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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광우 Apr 30. 2023

빠름과 느림

 아내와 함께 이태리여행을 다녀왔다. 어딘가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우리인지라 이번에도 자유여행을 선택했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선택한 날은 부활절 연휴가 겹쳐져있었다. 유명관광지를 예약하려 할 때마다 티켓을 구하는 일이 어렵더니 바로 그런 연유에서였으리라. 덕분에 우린 가는 곳마다 수많은 인파로 몸살을 앓아야했다. 여행지 중 한 곳인 로마를 여행하던 날이었다. 그날 오후의 여정은 바티칸시국이 중심이었다. 

 계획된 여행지는 두 곳이었다. 바티칸박물관과 성베드로성당. 말이야 두 곳이지만 사실 그건 바티칸여행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특히 바티칸박물관의 경우 볼 것이 워낙 많은데다 이동 동선이 길어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인기여행지였다. 그런 만큼 박물관 방문은 예약이 필수였다. 예약을 하면서 난 여유로운 관람을 위해 방문시간을 가능하면 아침 이른 시간으로 정하려했다. 그러나 그건 내 욕심이었다. 이미 예약자가 엄청났던 탓에 방문시간을 우리 입맛에 맞추는 건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오후 두 시에 방문예약을 한 건 그 때문이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시계는 정오를 갓 지나고 있었다.

 두 시간 정도 일찍 도착한 배경에는 나름의 의도가 자리하고 있었다. 성베드로성당의 경우 무료입장인데다 특별히 시간예약이 필요 없어 그곳을 먼저 들러본 후 바티칸박물관으로 향하겠다는 잔머리에 가까운 용의주도함의 결과라고나 할까?  박물관과 달리 성당은 예약제가 아니었기에 언제든 쉽게 입장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또한 그 근저에 깔려있었다. 

 하지만 바티칸 땅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나는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성베드로광장은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일정한 대열을 형성한 채 거대한 뱀처럼 꾸물거리고 있었고, 그것이 성베드로성당으로 입장하려는 관람객들의 줄임이 밝혀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열의 끝은 어딘지 확인이 되지 않을 정도로 길었다. 그들 사이에서 순서를 기다리다가는 박물관 관람시간을 놓치기 십상이었다. 아내는 혀를 내두르며 포기할 의향을 내비쳤다. 하지만 어렵사리 이태리까지 여행을 와서 그것을 보지 않고 그냥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최선의 결정을 내리기 위해 난 줄의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나마 줄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기다린다면 우리에게도 기회가 올 거라는 판단이 가능했다. 나는 아내를 설득한 후 줄의 꼬리 끝에 붙어 섰다.    

 예상은 또 한 번 보기 좋게 빗나갔다. 우리가 성당에 입장했을 때는 박물관 예약시간을 불과 삼십 분 정도 남겨놓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난 그것을 행운으로 여겼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적어도 성당을 둘러볼 기회는 잡은 셈이니. 자연히 관람은 보고 느낀다기보다 의무를 다하는 것 같은 형태로 이루어졌다. 휑하니 성당을 한 바퀴 돌면서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촬영한 것이 전부였다.

 바티칸박물관은 상황이 더 심각했다. 예약한 덕분에 패스트트랙으로 입장은 가능했지만 입장객들의 수가 상상을 초월해 들어서는 순간부터 떠밀려 다녀야했다. 무언가를 보기 위해 잠시 멈추기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뒤에서 사람들이 밀어댔고 지킴이들은 사고방지를 위해 빨리 이동할 것을 강요하다시피 했다. 그곳 역시 사진 몇 장 찍은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이었다. 기억에 남는 것이라고는 미켈란젤로의 그림 ‘최후의 심판’이 고작이었다. 그조차 지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마디씩 언급하지 않았다면 모르고 그냥 지나칠 뻔했다. 더군다나 그 방은 사진촬영이 허용되지 않았다. 난 몇 초 동안 작품을 눈에 담으려 애를 쓰면서 인파에 밀려 방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관람의 마지막 코스는 기념품 숍이었다. 그곳에는 기념품이랍시고 많은 사진들이 걸려있었다. 그 속에서 난 ‘최후의 심판’ 이외에 ‘천지창조’라든가 라파엘로의 ‘아테네학당’ 같은 그림의 사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때서야 그 그림들 또한 이곳의 소장품이라는 사실이 기억났다. 그걸 보겠다고 방문해놓고 정작 봐야 할 작품은 빠뜨려버린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성베드로성당에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조각상을 본 기억이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아쉬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호텔로 돌아오기 위해 메트로를 탔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과 동영상들을 하나하나 열어보며 느긋한 마음으로 오늘의 여행을 복기해보았다. 성베드로성당 내부를 촬영한 동영상을 재생할 때였다. 영상의 마지막 부분에서 낯익은 조각상이 발견되었다. 그건 다름 아닌 ‘피에타’였다. 내 시선을 통해 영상촬영을 진행하면서도 내 눈은 영상의 피사체를 보지 못하는 해프닝에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박물관에서 역시 그런 일이 벌어졌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진들을 하나하나 차분하게 점검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한 사진의 귀퉁이에 온전치 않은 모습이긴 하지만‘아테네 학당’이 포함되어있었다. ‘천지창조’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터넷 검색을 한 결과 그 그림은 ‘최후의 심판’ 작품이 있던 방의 천정에 자리하고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사진촬영이 금지된 방이라 내 핸드폰에서는 발견할 수는 없었지만 만약 촬영이 허용되었더라면 그 또한 어떤 식으로든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 분명했다. 내가 아닌 핸드폰 카메라가 여행의 당사자였음을 여실히 증명한 셈이었다. 실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울러 매사에 내가 얼마나 진정성 없이 형식에만 치우쳤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모습이기도 해 낯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그때 비웃기라도 하듯 내 눈앞에서 전광판이 환하게 켜졌다. 그곳에서는 불빛글자들이 느린 속도로 한 자씩 지나가고 있었다. 글자들은 곧 이런 문장을 완성해냈다. 빠름은 바름이 아닌 빠트림이지만 느림은 늦음이 아니라 누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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