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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광우 May 05. 2023

말의 힘과 그에 따른 책임

 얼마 전에 건강검진센터에서 문자가 왔다. 올해 검진대상자이니 적당한 시기에 검진을 받으라는 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니 검진을 받은 게 어느새 2년이 지나있었다. 내가 지독하게 싫어하는 일 중 하나가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와 마주하는 일인지라 검진 또한 피하고만 싶은 일이었지만 난 어렵사리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이 건강이라는 점에 조금의 이견도 없었을 뿐 아니라, 그것의 가장 큰 적인 병이라는 놈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령 놈이 침투해왔다 하더라도 조기에 그걸 발견한다면 퇴치할 가능성이 높았기에 검진이라는 경계병의 역할을 중요시 여기지 않을 수 없기도 했다. 

 검진날짜를 예약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상담원은 친절하게 응대해주었다. 위내시경과 대장내시경이 검진항목에 추가되었고 거기에 맞춰 검진날짜가 잡혔다. 내시경 사전준비를 위해 미리 약물을 수령해야한다는 안내가 이어졌고 검사에 부적합한 사항이 없는지 사전 문답이 이루어졌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과정이 멈춰선 건 평소 수면무호흡증세가 있는지 질문한 단계에서였다. 순간 그 증세가 코골이와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던 어떤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아울러 언젠가 나를 향해 내뱉던 아내의 불만도 기억났다. 술을 얼마나 마셨기에 간밤에 코골이가 그렇게 심해? 내가 유달리 그 말을 또렷이 기억할 수 있었던 건 남의 잠자리를 방해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난 상담원에게 아내로부터 코골이가 심하다는 말을 들었노라 실토하면서 혹시 수면무호흡증과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그녀의 태도가 돌변했다. 대장내시경이 포함되어있어 수면상태로 검사를 하게 되는데 수면무호흡이 있는 경우 검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수면무호흡증 환자의 경우 검사 중에 산소포화도가 급격히 떨어져 위험할 수가 있는데 그곳에는 응급실이 비치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를 들이대면서. 몇 마디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지만 무작정 오랜 시간 통화를 할 수는 없어서 정확한 증상을 아내에게 확인한 후 다시 통화하기로 하면서 전화는 끊어졌다. 

 통화내용을 설명하면서 나의 코골이 증상에 대해 아내에게 문의했을 때 아내는 펄쩍 뛰었다. 술을 많이 마신 날 코를 골았다고 말했지 언제 수면무호흡증이 있더라는 말을 했냐면서. 나의 경우 수면무호흡증세와는 전혀 상관없는 단순 코골이일 뿐이라 강조하기까지 했다. 말을 듣고 보니 없잖아 내가 과도하게 코골이와 수면무호흡증을 동일시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다시 검진센터로 전화를 했다. 비교적 상황설명을 자세히 하면서 앞서 통화를 할 때도 수면무호흡증이 있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코골이가 그것과 연관되어있지나 않을까 걱정했을 따름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녀 역시 과하게 반응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통화하는 내내 내가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닌지 미심쩍어하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어쨌든 검진예약은 무사히 끝이 났다.

 전화를 끊은 뒤였다. 무언가 개운치 않은 느낌이 계속 내 주변을 떠다녔다. 그건 일종의 의심이었다. 정말 내가 수면무호흡증으로부터 자유로울까 하는. 아내가 나를 속여서라기보다는 잠자리에서만 확인 가능한 증세이기에 아내 또한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거기다 수면무호흡이라는 것이 오랜 시간 이어지는 증세는 아니었다. 만약 그렇다면 벌써 죽음에 이르렀거나 심각한 상태에 빠져 있을 테니까. 의문은 두려움을 동반했다. 만약 그 증세가 있다면 내시경을 하는 동안 상담원의 말처럼 위험상황에 빠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 더군다나 그곳에는 응급실마저 없다고 하니 그런 상황이 오면 치명적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검진을 포기하자니 그건 또 아까웠다. 이번에도 쉽지 않은 결심을 한 것인데 다음번에 다시 또 힘든 결심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득하기만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검진을 미룬다면  다음 검진은 응급실이 있는 다른 병원을 선택해야한다는 말이고 나에 관한 이전 진료기록이 없는 그곳에서 검진을 받기 위해서는 귀찮은 일들이 상당히 수반될 게 뻔했다. 결국 난 다시 한 번 나의 상태를 재확인해보기로 했다.  

 현재 상태에서 나의 수면무호흡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은 아내밖에 없었다. 아내에게 다시 물었다. 나의 코골이가 확실하게 수면무호흡과는 상관없는 것이냐고. 갑자기 아내부터 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당신 코골이 심한 거 절대 아니야. 평소 때는 잘 골지도 않을뿐더러 술을 과하게 먹은 날만 조금 고는 거야. 수면무호흡증세와는 전혀 상관없으니 아무 걱정 마. 그 말은 적잖이 나를 안심하게 만들었다. 결국 나는 그대로 검진을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며칠 후 난 검진을 아무런 이상 없이 마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수면무호흡증에 관한 불안감을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하고 있다. 난 그것이 말의 힘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이란 한 번 내뱉고 나면 영원히 없었던 일이 되지 않는다. 때문에 난 앞으로도 계속 수면무호흡이라는 단어에 민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 그 단어는 이미 나에게 트라우마로 자리 잡은 건지도 모른다. 덕분에 아주 중요한 걸 깨우쳤다. 내가 무심코 내뱉은 말 때문에 지금 나와 같은 일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앞으로는 말하기에 앞서 잠깐 동안이나마 생각하는 습관을 들여야겠다고 다짐했다. 쉽지는 않겠지만 내 말로 인해 나중에 발생하는 피해의 크기를 생각한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으리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SNS에 글을 올릴 때도 마찬가지다. 그건 말과 달리 수정이나 삭제가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수정이나 삭제 전에 이미 그 글을 읽은 사람에게는 그 또한 아무 소용이 없다. 말과 글, 적어도 내 손과 내 입을 통과한 것이라면 마땅히 그 책임은 고스란히 내가 져야함을 단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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