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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광우 May 18. 2023

운명과 사명

 가끔 운명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때가 있다. 과연 내 삶에 운명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는 것인가 하고. 그때마다 내 마음은 존재한다는 쪽으로 무게추가 기운다. 그렇다고 운명론자처럼 그것을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도 끄트머리에는 여전히 의문부호 두어 개쯤을 갖다 붙이곤 한다. 그 정도나마 운명을 믿는 것은 그동안 살아온 내 삶의 궤적과 관계가 있다. 어쩌다 전혀 기대하지도, 예상하지도 않았던 일이 생길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운명과 결부 짓지 않는 이상 딱히 발생사유를 설명할 길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물론 그 또한 우연이라며 간단히 치부하고 넘겨버리면 그만이지만 그 횟수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매번 그러기에는 인생의 무게를 너무 가벼이 취급하는 느낌이 든다.  

 사람은 각자 다른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다. 주변 환경은 차치하고라도 우선 개인적 특성이 다 제각각이다. 두뇌가 뛰어난 사람이 있나하면 신체조건이 우수한 사람이 있다. 장수하는 사람이 있나하면 단명하는 사람도 있고,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 있나 하면 지극히 논리적인 사람도 있다. 운명의 근원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하긴 이 또한 단순한 유전자 조합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러기에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들이 너무 많다. 수수께끼조차 아직 인간의 과학수준이 가닿지 않았을 뿐 언젠가는 밝혀질 문제라며 아예 운명과의 관계를 차단하며 부정하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게 있다. 이 글을 쓰는 나의 의도가 운명의 존재여부를 두고 갑론을박하자는 것이 아니며, 운명이 존재한다고 설득하고자 하는 건 더더욱 아니라는 점이다. 그저 아직 우리에게 미지의 세계로 남아있는 영역을 운명이라 이름 짓고 그 가정 하에 우리가 살아가야하는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을 따름이다.

 태어난 조건을 운명이라 한다면 그건 자라면서 충분히 바꿀 수가 있다. 부족한 신체적 능력이나 지적 능력을 후천적인 노력으로 극복하는 것이 좋은 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일 또한 아니다. 아니 어렵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그들의 노력을 더 높이 사고 더 큰 박수를 보낸다. 또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그런 사람들을 본받아 운명을 극복하고 개척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천재는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의 노력에 의해 결정된다.’라는 에디슨의 말도 그것과 일맥상통한다. 안타까운 건 그런 결과를 얻기 위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이겨내야 하고 현재를 깡그리 희생해야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과연 운명을 개척하는 것만이 능사일까? 한 번쯤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에게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게 있다는 건 태어날 때부터 신이나 절대자가 맡긴 것이 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우리를 주체로 하면 운명이겠지만 신이나 절대자를 주체로 표현하면 그 말은 사명이라는 말로 바꿔 부를 수가 있다. 운명이 있다고 가정한 순간 이미 신이나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한 셈이니 더 이상 종교문제를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운명을 그렇게 사명이라는 말로 바꾸어 놓으면 뉘앙스가 많이 달라진다. 바꾸고 개척하려기보다 순응해야 한다는 느낌이 훨씬 강하게 든다. 나아가 운명을 거스르려 할 때보다 오히려 그대로 따르려 할 때 훨씬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한 것처럼도 느껴진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운명을 극복의 대상이라고만 여기면서 그쪽에만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도 지극히 일방적이고 편협한 사고에 불과한 일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운명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개척하는 것이 옳은가 순응하는 것이 옳은가? 결국 그 결정은 각자의 몫이다. 나에게 주어진 조건이나 환경이 내가 원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낙담하지 말고 강한 의지로 과감하게 도전해 바꾸려해야한다. 다만 그 과정이 너무 힘들고 불가능하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다. 그럴 때면 구태여 거스르려만 말고 순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양보하고 참는 것이 꼭 옳다고만 말할 수 없다. 어쩌면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이 현재가, 불확실한 미래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다. 행복감을 비교할 때도 특정한 기간의 것만을 측정해 평가하지 말고 인생전체의 행복총량을 측정해 평가한다면 그 결과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중요한 건 운명을 개척하는 자만이 승리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운명에 순응하는 자 역시 충분히 승리자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운명에 순응하는 자가 최후의 승자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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