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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광우 May 24. 2023

완벽한 결혼생활이 되기 위해서는 두 번씩 결혼해야한다.

 친구의 아들이 결혼한다는 모바일청첩장이 전달되어 왔다. 내 나이가 어느새 이순(耳順)을 넘었으니 자식들의 혼사가 뭐 그다지 특별한 화젯거리는 아니다. 그럼에도 오늘따라 그 결혼이라는 단어는 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건 청첩장을 받는 순간 떠오른 그와의 아주 오래 전 추억 때문이었다. 

 대학을 다닐 때였으니 40년은 족히 지난 일이다. 엠티를 가 팀별로 주제토론이 벌어졌다. 그날의 주제는 이상적인 결혼이었다. 그와 나는 같은 팀이었는데 우리가 도출한 방안은 사회통념을 완전히 허물어버리는 아주 파격적인 것이었다. 당연히 현실성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걸 그대로 옮기자면 이렇다. 완벽한 결혼생활이 되기 위해서 모든 사람은 전 생애에 걸쳐 두 차례 결혼해야한다. 첫 번째는 남자가 20대에 도달했을 때 50대의 여자를 배우자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50대 여자는 경제적으로는 안정되어있지만 육체적 사랑에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반면 20대 남자는 육체적으로는 건강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아직 자립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이런 두 사람은 서로의 단점을 장점으로 상쇄시킬 수 있는 최상의 결합조건이다. 그 후 세월이 지나 남자가 50대가 되면 다시 20대의 여자와 결혼한다. 그때는 반대로 20대 여자는 자신이 갖지 못한 경제적 안정을 누릴 수 있을 것이고 50대 남자는 육체적 사랑을 통한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사실 지금 생각해도 이 방법은 윤리나 도덕적 관념에서 벗어나 이론적으로만 생각한다면 꽤나 합리적이어서 세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결혼관이긴 하다. 

 물론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우선 사회적 관습은 차치하더라도 인간의 수명이란 게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게 아니어서 거기서 빚어지는 문제만 해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여든이 넘어서까지 장수하는 사람들의 경우가 문제다. 그 이론에 따르면 그들의 배우자는 50대로서 20대와 다시 결혼해야 하는 나이다. 결국 80대에 들어선 노인들이 발붙일 곳은 어디에도 없는 셈이 되고 만다. 뿐만 아니라 부와 가난이 대물림된다는 점도 있다. 앞선 세대로부터 경제력을 물려받는다는 것이 이론의 핵심인 만큼 다음 세대는 앞 세대의 부와 가난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수밖에 없다. 부자(富者)는 부자로 빈자(貧者)는 빈자로 계속 살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는 것이다. 

 당시 우린 이런 문제에 대한 대책도 나름 수립해두고 있었다. 여든이 넘은 사람들의 문제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으로 해결책을 제시했다. 소위 요즘 유행하는 실버타운 같은 환경을 염두에 둔 것이다. 만약 그 이론이 사회에 정착된다면 정부주도 하에 그런 마을과 시설들을 조성하고 마련할 수 있으니 사실 크게 문제될 것도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굉장히 창의적인 발상임에 틀림없었다. 우린 빈부의 대물림문제도 아무 것도 아닌 양 일갈했다. 공산주의가 아닌 이상 빈부격차는 어느 세상에나 존재하기 마련 아니냐며. 게다가 푼돈이라 하더라도 이전 세대로부터 조금이나마 물려받아 출발할 수 있으니 빈손에서 출발하는 것보다는 백번 나을 거라 합리화하는 일도 마다않았다. 

 그때만 해도 지독한 가난에 찌들려 부모님들로부터 학비를 받아쓰는 것조차 못내 죄송스럽게 여기던 시절이었다. 자연히 돈과 경제력이 초미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던 우리는 무슨 큰일이라도 해낸 것처럼 의기양양했다. 심지어 그런 결혼문화가 정착되었으면 하고 쓸데없는 망상에 사로잡히기까지 했다. 오죽하면 그런 시스템을 당장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적보수성을 한탄하며 넋두리를 해대곤 했을까? 

 생각해보니 그 이론대로 살아왔다면 난 지금 두 번째 결혼생활에 젖어있을 시기다. 그 말은 여태껏 내가 쌓아왔던 경제력을 20대의 배우자에게 넘겨주어야 할 때라는 의미다. 뿐만 아니라 곧 80대들의 공동체 속으로 사라져 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그 모든 것은 20대 배우자를 얻으면서 누린 만족감에 대한 지불비용이다. 또 내가 모은 돈이라는 것도 아주 많은 것이 아니라 겨우 빈곤을 면하는 수준일 수 있으며, 80대가 될 때까지 건강하게 살아있으리라는 보장조차 없다. 그럼에도 시각(視角)을 현재 시점으로 바꿔 보니 그 결혼제도라는 것이 심히 못마땅했다. 내가 그동안 수고해서 이뤄놓은 것들이 죄다 남에게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열심히 살아온 대가가 이런 것인가 싶은 게 그처럼 불공정한 제도가 없었다. 

 불만은 생각을 확장시키는 불씨로 작용해 그 옛날 더 없이 좋은 제도라고 옹호했던 시절로 나를 돌아가게 해주었다. 새로운 관점은 내가 간과했던 점들을 하나하나 깨닫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불만의 본질이던 나의 경제력은 순수한 내 수고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그건 20대의 나이에 내가 첫 결혼을 할 때 배우자로 택했던 50대의 여성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또 그때의 아내는 이 세상을 떠났거나 살아있어도 이미 노인들 공동체로 떠나버린 상태다. 그런 사실을 난 깡그리 망각하고 있었다. 자기중심적 사고와 이기적 본능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아울러 평소의 내 이중적 인격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한 가지 제도를 두고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 모순적이라고 비판을 하기도 하고 합리적이라고 옹호를 하기도 한 셈이었으니. 

 상대의 입장과 관계없이 자신의 이익에만 집착하는 진정한 내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준 것 같아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신문이나 각종 매스컴을 통해 사회 각 분야에서의 갈등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비분강개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마다 난 양쪽이 상대를 배려하면서 조금씩만 양보하면 쉬 해결될 것인데 왜 그러지 못하냐며 그들 모두를 싸잡아 비난하곤 했다. 알고 보면 그 갈등의 중심에 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역지사지할 줄 모르는 이기심의 온상은 바로 나였던 것이다. 속물적인 속내를 들킨 듯한 기분을 숨길 수 없었다. 

 문득 친구 아들의 결혼식에 꼭 참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친구를 만나면 다시 한 번 물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 결혼방식을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데는 변함이 없냐고. 감사의 인사 또한 전하고 싶다. 나의 진정한 면모를 깨닫고 반성하도록 청첩장을 보내준 데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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