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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광우 Aug 04. 2023

나이가 들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

 모처럼 헬스장을 찾았다. 복지 차원에서 아파트주민자치회가 값싼 비용으로 운영하는 곳이다. 근육질의 몸매와는 거리가 먼 나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소지만 오늘 내가 그곳을 찾은 궁극적인 이유는 미세먼지 탓이다. 매사 게으름으로 무장하고 살면서 그나마 운동이랍시고 유일하게 몸을 놀리는 일이 아침 달리기인데 미세먼지 경보가 그것조차 못하게 막아선 것이다. 안 그래도 기관지가 좋지 않아 가래기침을 달고 사는 처지였으니 오늘같이 대기 질이 좋지 않은 날 야외활동은 나에게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약을 구하려다 독을 얻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아파트의 헬스장을 이용하면 그것 말고도 좋은 점이 또 있었다. 바로 아래층에 갖추어진 목욕탕에서라면 운동으로 흘린 땀을 씻어내는 것은 물론 긴장된 근육을 이완시키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간단히 몸을 푼 후 트레드밀 위를 한참 달릴 때였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 한 분이 대걸레로 바닥을 닦게 시작했다. 관리실에서 고용한 헬스장 청소부였다. 오랫동안 그 일을 한 탓인지 그는 구획을 나누어 자신만의 순서로 꼼꼼하게 닦으면서 차츰차츰 내가 있는 곳으로 접근해왔다. 달린지 꽤 시간이 지났을 뿐 아니라 원래부터 땀이 많은 내 주변에는 여기저기 땀방울들이 튀어있었다. 때문에 그의 걸레질은 나를 둘러싸고 꽤 긴 시간 이어졌다.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어르신에게 괜한 고생을 시킨 것 같아 민망한 마음이 들었지만 도중에 달리기를 그만두지 못해 난 애써 모르쇠로 일관했다. 달리다 멈춰서면 다시 달리는 일이 몇 배나 힘들어진다는 핑계를 마음속으로 들이대며 자신을 합리화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결국 10킬로미터를 다 채우고서야 트레드밀은 작동을 멈추었다. 운동복은 상하의 모두 땀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덩달아 기구의 위는 물론 주변 바닥에도 땀이 흩어져 방금 전에 행한 어르신의 청소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비용을 지불하는 이용자와 급여를 받는 청소부의 관계라 하더라도 무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난 휴지가 비치된 곳으로 가 두루마리를 한 움큼 풀어낸 뒤 그것으로 바닥이며 기구들을 닦기 시작했다. 완벽한 청소가 될 리는 없겠지만 최소한의 에티켓은 발휘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궁여지책의 일환이었다. 

 그 사이 어디선가 어르신이 다시 나타났다. 여전히 대걸레를 쥔 그는 내 어깨를 툭 치더니 비켜나라는 뜻으로 손목을 휘저었다. 주춤주춤 물러나는 나를 향해 농담조의 말도 잊지 않았다. 괜히 남의 일자리 뺏을 생각 마시우. 눈가에 환한 웃음이 걸린 게 아주 온화한 표정이었다. 거침없이 내지르는 그의 걸레질에 땀의 흔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번거롭게 해드렸군요. 나도 모르게 사과의 인사가 튀어나왔다. 무슨 말씀을. 이게 내 일인데 뭐. 열심히 뛰는 게 보기에 좋기만 하던 걸. 그의 얼굴에 서린 나이테 같은 주름 사이로 푸근함과 친근감이 잔뜩 묻어났다. 

 문득 나이가 들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던 에이브러햄 링컨의 말이 생각났다. 자신이 하는 행동이나 품은 생각이 세월이 흐르면서 고스란히 얼굴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뜻의 바로 그 말. 그건 또 거울을 대할 때마다 욕심과 고집이 뒤룩뒤룩 배어나오는 내 얼굴을 보면서 제발 더 이상 흉한 모습으로 늙어가지 않았으면 바라는 마음을 품게 하던 말이기도 했다. 어르신의 얼굴은 내가 바라던 바로 그런 모습이었다. 아마도 긍정적인 마인드와 유머가 그걸 만들어냈으리라. 새삼 느끼는 바가 컸다.

 운동을 끝내고 목욕탕을 찾았다. 샤워를 끝내고 사우나 실에서 건식찜질을 즐기는데 또 다른 어르신 한 분이 문을 열고는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온도 괜찮아요? 혹 뜨겁지 않아요? 질문하는 내용이나 목욕탕 안에서 옷을 입은 것으로 보아 그곳에 고용된 사람이 틀림없었다. 딱 적당하다는 말로 만족스러움을 표시하는데 그의 말이 이어졌다. 이런, 여기에 땀이 많이 고였네. 자칫하면 미끄러지겠구먼. 흥건할 정도로 땀이 고인 그곳은 역시나 바로 내 앞이었다. 몸 둘 바를 몰라 하는데 어느 샌가 그는 마른 대걸레를 가져와 그곳을 닦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그저 가만있기 미안했던 나머지 엉겁결에 내뱉은 말이었다. 무슨 말씀을. 급여를 받는 값은 해야 할 것 아니우. 그의 얼굴에서도 웃음꽃은 사라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인자함이 가득 퍼져나 헬스장 어르신만큼이나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지는 분으로 여겨졌다. 

 땀을 흠뻑 흘릴 정도의 운동과 몸을 깨끗이 씻어낸 목욕에 더해 두 분의 친절은 나의 기분을 최고조에 이르게 했다. 흐뭇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엘리베이터에서 앞집 아저씨를 만났다. 내가 매일 달리기를 한다는 걸 알고 있던 그는 오늘도 그걸 화제로 삼았다. 정말 대단하세요. 그렇게 열심히 운동하면 매년 건강검진 같은 건 필요도 없겠어요. 그 말에 난 며칠 전 받은 검진결과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기엔 내시경 결과 역류성식도염과 위염증세가 있으며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으니 경계해야한다는 소견이 붙어있었다. 음주라는 나쁜 습관이 가져다준 결코 건강하다고 말할 수 없는 성적이었다. 속빈 강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울러 나야말로 내 얼굴에 대해 전혀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앞집아저씨는 나를 좋은 습관을 가진 건강한 남자로 여기며 부러워했지만 사실 난 매일같이 음주와 나쁜 식습관으로 건강을 해친 무절제한 사람에 불과했다. 그것이야말로 남을 기만하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몇 년 후 나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주름살투성이에 일그러지고 심술보가 주렁주렁 달린  보기에도 흉한 노인네가 그려졌다. 닮고 싶다던 헬스장이나 목욕탕 어르신과는 정반대의 얼굴이었다. 그걸 막으려면 지금이라도 내 몸과 얼굴에 알맞은 책임을 져야만 한다. 다른 사람에게 겉모습이나마 건강하게 보였다면 거기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고 건강해지려 노력해야한다. 그걸 게을리 하는 순간 나쁜 생활습관에 맞춰 흉악하고 포악한 모습으로 변해갈 것이고 그건 다시 나쁜 언행과 태도를 낳으며 악순환을 거듭할 것이다. 갑자기 두려워졌다.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이 이렇게 무섭다는 걸 비록 늦었지만 지금이나마 깨닫게 된 건 행운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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