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 아옌데는 처음으로 대하는 작가였다. 때문에 별다른 생각 없이 이 책의 첫 페이지를 열었다. 딱히 선입견도 없었고 기대감도 없었다. 그저 남미소설이라는 점만 머릿속에 남아 밀림과 후덥지근한 기후 속에서 다분히 정열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상이 아슴아슴 그려질 뿐이었다. 그런데 채 몇 페이지를 넘어가지 않아 나의 호기심은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흥미는 급작스럽게 불어났고 좀체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책날개에 붙은 저자소개로 돌아가 그녀의 대표작들을 외워두었다. 또한 좋아하는 작가 리스트의 상단에 그녀의 이름을 기록해두는 일도 잊지 않았다.
소설은 19세기의 칠레사회와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개척시대를 주 배경으로 펼쳐진다. 칠레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엘리사라는 한 소녀가 사랑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떠나 그곳에서 정착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녀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구속이 만연한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사회로부터 탈출해 자유의 소중함을 깨우치는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작가는 그녀의 여정을 통해 당시의 계층 간 차별문제를 심도 깊게 다룰 뿐 아니라 황금만능이 팽배한 시대적 상황을 여과 없이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그러한 차별문제는 크게 두 가지 관점으로 다루어진다.
첫째는 남녀 간의 차별이다. 그 시대의 여성은 특별한 이유 없이 그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불이익을 받았다. 사회진출은 제한되었고 가부장제 관습 하에서 남자들에게 예속되는 삶을 살았다. 결혼을 할 때도 지참금을 강요받았으며 혼전순결을 지키지 못할 경우 상황과 관계없이 사회로부터 배척받았다. 소설 속에서는 많은 인물들이 그 피해자로 등장한다. 사생아를 낳았다는 이유로 집안에서 쫓겨나 평생을 가난과 모욕 속에서 살아가는 호아킨의 어머니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유부남이라는 것을 숨기고 접근한 칼 브렛츠너와의 실패한 사랑으로 평생 독신을 고집하는 미스 로즈 역시 그러하다. 캘리포니아에서 미천한 생활을 영위하는 ‘더러운 비둘기들’과 ‘싱송걸즈’ 또한 피해당사자들이다.
그런가 하면 그러한 관습에 맞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여자들의 모습도 등장한다. 타고난 집안의 재력을 바탕으로 사업적 수완을 발휘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파울리나, 여성성을 무기로 숱한 남자들뿐만 아니라 왕까지 굴복시키는 고급 창녀 롤라 몬테스, 유곽을 운영하면서도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남다른 정의감을 실천하는 ‘무시무시한 조’ 같은 인물들이 그들이다.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남자를 찾아 모든 걸 내팽개치고 칠레에서 캘리포니아까지 먼 길을 떠나는 엘리사 또한 동일한 부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남장을 한 채 온갖 고생과 마주하는 여정을 이어가면서도 병자를 구하는 등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행동을 펼치며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인종간의 차별이다.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하는 범죄나 사회문제들은 대부분 거기서 출발한다. 법적으로는 노예해방이 이루어졌음에도 소작이나 하인이란 명목으로 노예와 다름없는 제도가 공공연히 횡행되는가 하면, 인디오들은 가는 곳마다 영국계나 스페인계의 백인들로부터 차별을 받는다. 또 금 채굴은 모든 사람들에게 문호가 개방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양키들의 집단 이기주의로 인해 히스패닉계와 아시아인종들은 소외되고 무시당한다. 호아킨 무리에타 같은 도적떼가 출현하고 그들이 알게 모르게 추앙받는 것도 따지고 보면 차별을 받는 무리들이 살길을 모색하기 위함이다.
차별문제와 맞물려 남성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를 살펴보는 것도 꽤 흥미롭다. 존 소머즈는 영국계의 범선선장이다. 그런 만큼 차별문제로부터는 자유롭다. 아니 오히려 그 때문에 혜택을 누리는 부류에 해당한다. 그는 자유분방한 성향 탓에 이름조차 잘 모르는 여자와의 사이에 사생아를 낳는다. 그 아이는 제 어머니에 의해 소머즈 집안에 버려지고 존은 자신의 딸인 줄 알면서도 체면과 위신 때문에 밝히지 못한다. 아이러니는 여기서 생겨난다. 차별의 수혜자인 그지만 딸은 차별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그걸 막기 위해 그는 동생인 미스 로즈로 하여금 양어머니가 되어 자신의 딸을 양육하게 하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한다.
호아킨 안디에타는 사생아로 태어나 끔찍할 정도로 가난을 체험하는 대표적인 차별 피해자다. 차별철폐를 주장하는 지식인으로 성장하고 자유사상가가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부 없이는 이상을 실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엘리사와의 사랑까지 멀리 하면서 금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그리곤 그곳에서 인종차별에 대항하는 도적떼의 수괴가 되지만 불행한 최후를 맞으면서 결국은 차별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제이컵 토드라는 인물은 무모할 정도로 도전적인 영국인이다. 성경을 팔겠다는 내기를 해 처음 칠레에 와서는 선교자금을 횡령하는 바람에 영국으로 쫓겨 간다. 그리곤 기자가 되어 캘리포니아로 다시 돌아와서는 인기와 부를 얻기 위해 거짓기사를 남발한다.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기사를 쓰긴 하지만 그건 진심에서 우러난 행위가 아니라 개인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즉 그가 주장하는 차별철폐는 자신의 기득권을 놓으려는 의지가 상실된 겉치레일 따름이다.
가장 적극적으로 차별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은 중국인 타오 치엔이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칠레로 와 엘리사와 함께 캘리포니아로 가게 된다. 배에서 유산을 하는 엘리사를 치료하면서 우정을 쌓은 그는 캘리포니아에서 중국의 관습과 전통을 벗어던지고 의사로 활약한다. 이후 엘리사와 재회해 자신의 의술을 바탕으로 그녀와 함께 차별받는 여성들을 구조하는 활동을 펼치면서 정의를 구현한다.
소설을 통해 우리는 차별문제에 대한 나름의 해결책에 접근할 수가 있다. 다만 구체적인 방법이나 설명으로 제시되지는 않는다. 앞서 언급한 파울리나와 롤라 몬테스, ‘무시무시한 조’의 삶이나 엘리사, 타오 치엔의 삶을 추적하다보면 저절로 가슴에 와 닿는다. 어쩌면 그래서 그 울림이 더 큰 지도 모른다. 그들은 여자라는 점, 그리고 유럽과 미국의 백인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어떤 누구보다 차별받는 대상이었다. 직접 피해를 당한 당사자였기에 그들에게 차별은 반드시 극복해야할 절실한 문제였을 것이다. 어떤 문제든 자신이 직접 당해보지 않으면 그 심각성을 온전히 느끼기는 어렵다.
‘운명의 딸’ 후속이야기는 아옌데의 다른 작품인 ‘세피아 빛 초상’에서 또 다른 역사와 무대를 배경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그것에 대한 나의 관심은 벌써부터 폭발조짐을 보이고 있다. 조만간 내 손에 그 책이 들려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과 관계없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운명의 딸’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실망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라 자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