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500여 페이지가 넘는 장편이지만 그 구성을 들여다보면 그리 복잡하지는 않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참 막바지로 치닫던 시기 러시아 전선에 투입되었던 한 병사가 3주간 휴가를 부여받게 되는데 그 기간을 포함해 전후로 벌어지는 전쟁 상황을 다룬 것이다. 시간 순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뿐 아니라 공간적인 배경도 전쟁의 최전방인 러시아 전선과 연합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독일의 도시 두 군데뿐이다. 거기다 내용 또한 중간 중간에 적절하니 긴박감을 주면서 흥미진진하게 진행되어 누구라도 아주 편하게 읽을 수가 있다. 덕분에 나 또한 근래 보기 드물게 빠른 시간 내에 책을 다 읽을 수 있었다.
테마는 크게 세 가지라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의 참상, 그 가운데서 피어나는 젊은 남녀의 아름다운 사랑, 그리고 나치독일 정권의 독재와 호전성에 대한 비판이 그것이다. 이러한 점들은 주인공인 에른스트 그래버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의 시선으로 적나라하고도 예리하게 파헤쳐진다.
우선 전쟁의 참상은 전후방을 막론하고 치가 떨릴 정도로 자세하고 정밀하게 묘사된다. 전선에서 눈이 녹으면서 드러나는 시체들에 대한 표현은 읽는 순간 몸서리가 쳐질 뿐만 아니라 당장 주변에서 엄청난 악취가 풍기는 듯한 환각에 빠져들게 만든다. 가족을 찾아 폐허가 된 도시를 누비는 그래버가 마주하는 정경들도 아주 생생하다. 의식주라는 인간의 기본 권리마저 누리지 못하는 시민들, 의수나 의족 내지는 목발과 같은 보조기구에 의지해야만 움직일 수 있는 부상병들,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는 경보사이렌, 가족들을 찾기 위해 붙여놓은 폐허 속 나부끼는 종이쪽지들, 난민 수용소로 변해버린 종교시설, 무너진 건물잔해 속에서 벌이는 인명구조 활동. 글속의 장면들은 금방금방 이미지화되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 와중에도 작가는 사치와 향락을 누리는 무리들을 잊지 않고 고발한다. 전쟁으로 인해 오히려 부와 권력을 누리는 알폰스 빈딩과, 먹을 것이 없는 서민들과는 정반대로 술이며 갖가지 사치품들이 즐비한 그의 호화저택은 독자로 하여금 극도의 분노를 야기한다. 호텔 게르마니아를 드나드는 장교와 고급간부들에 대한 비난은 그래버가 재치를 발휘해가며 엘리자베스와 함께 그곳을 이용하게 함으로써, 또 그곳이 폭격을 받아 아수라장이 되도록 설정함으로써 대신한다.
그런가 하면 그래버와 엘리자베스가 키워가는 삼 주 간의 사랑은 아주 애틋하면서도 아름답게 그려낸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그들은 절대 비관하지 않는다. 둘 모두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였음에도 좌절하지 않고, 강제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엘리자베스의 상황과 전선으로 돌아가야 하는 그래버의 현실에도 불행으로 여기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스위스와 같은 나라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으리라는 긍정적인 자세도 가진다. 그런가 하면 독일이 폭격을 감행한 네덜란드나 프랑스로 가면 환영받지 못할 거라며 자신의 나라가 저지른 만행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도 유지한다. 특히 엘리자베스는 전쟁을 종식시키고 미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아이를 갖겠다는 당찬 포부까지도 드러낸다. 이런 의식을 바탕으로 이들은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휴가기간 중에 결혼을 성취한다. 사랑이 역경을 이기고 승리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행복은 오래 이어지지 못한다. 귀대한 그래버는 결국 죽고 만다. 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새드엔딩으로 치부하며 이 소설을 비극으로 받아들이기에는 곤란한 면이 없지 않다. 그들의 사랑은 종말을 고한 것이 아니라 한 단계 승화한 것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나치 정권의 폭력성과 독재에 관한 내용은 소설의 전반에 걸쳐 표현된다. 폴만 선생님에 대한 감시와 억류 그리고 체포, 요제프 같은 유대인들에 대한 끝없는 추적, 반체제성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수용소로 끌려간 크루제 박사와 그의 의문사, 리저 부인의 엘리자베스 감시활동, 하이니를 통해서 밝혀지는 수용소에서의 잔인한 만행, 군대 내에서조차 슈타인브레너에게 감시당하는 병사들. 사실 이 모든 것들은 독일 국민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합법적으로 나치정부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작가는 그런 의미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전세가 기울어 그래버의 부대는 후퇴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이때 슈타인브레너는 갇혀있는 러시아의 민간인들을 죽이려든다. 만류하던 그래버는 인간애를 구현하는 차원에서 동료인 슈타인브레너를 사살하고 그들을 풀어준다. 그러나 도망가던 그들 중 한 명이 그래버를 총으로 쏜다. 온갖 악조건의 전투 속에서도 살아남은 그래버는 그렇게 허무하게 죽는다.
그렇다면 그래버는 자신이 살려주려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한 것일까? 그들은 그래버가 판단한 것처럼 민간인이 아니라 슈타인브레너의 생각처럼 게릴라였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단지 그들은 자신들이 도망가는 도중에 그래버가 총을 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 결과 살기 위해서 총을 쏘았을 것이다. 풀려나자마자 총을 쏜 것이 아니라 한참 달아나다 총을 쏘았다는 말이 그걸 설명해준다. 일종의 오해가 부른 참극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신이 그래버에게 전쟁을 일으킨 나라의 국민으로서 책임을 물은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난 뒤 아주 인상 깊은 구절이 계속 입가를 맴돌았다. 엘리자베스가 그래버에게 한 말이다. “저마다 제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다른 사람한테 강요하지 않는다면 전쟁은 덜 일어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 말은 국가 간의 전쟁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인간관계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다. 인간의 독선과 아집이 작게는 싸움을 불러일으키고 크게는 전쟁을 부른다는 뜻이다. 며칠 전 죽마고우들과의 모임에서 난 한 친구와 사소한 이유로 말다툼을 벌였다. 바로 그 다툼의 이유가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을 그 친구에게 강요한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깨달음을 나에게 던져주었다. 이 책을 읽은 기념으로 그 친구에게 화해의 손짓을 내밀어봐야겠다. 그리고 내 뜻을 주장하기에 앞서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훈련을 서둘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