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양 - 다자이 오사무

by 원광우

사양(斜陽)은 저무는 해를 의미한다. 제목처럼 이 소설은 몰락해가는 한 귀족 가족의 삶을 이야기한다. 경제능력을 상실한 귀족계급이 어떠한 생활을 하며 그들이 행하는 사랑은 어떠한 모습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소설 속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굉장히 어둡다. 그건 작가가 살아온 삶과 궤도를 같이 한다. 특히 등장인물 가운데 나오지와 우에하라의 삶에서 염세주의 성향이 강하게 엿보이는데 아마도 작가 자신의 실제모습을 그들에게 투영시킨 결과 일 것이다.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인물은 네 명으로 압축할 수 있다. 화자인 나 가즈코를 중심으로 어머니, 동생인 나오지, 그리고 내가 연정을 품게 되는 소설가 우에하라가 그들이다. 여기에 2차 대전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관여한다. 전쟁은 귀족계급이던 가즈코의 집안이 몰락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이미 아버지가 돌아가신 상태에서 나오지는 징집을 당하고, 가즈코는 징용을 나가며, 도움을 주던 와다 외삼촌으로부터는 도움이 차단되어 경제적인 어려움이 가중된다. 결국 이들은 살림의 규모를 줄이기 위해 도쿄에서 이즈의 산장으로 이사를 간다. 소설이 중점적으로 다루는 내용은 그 와중에 이들이 어떻게 각자 자신들의 삶을 헤쳐 나가는가 하는 것이다.

우선 어머니는 가난으로 살림이 피폐해져도 기품을 잃지 않는다. 의복을 팔면서도 궁색하게 살지 않으려 애쓰고 유머감각 또한 잃지 않는다. 가즈코가 장작관리를 잘못해 집 전체가 화마에 휩싸일 뻔했을 때조차 장작이란 원래 불을 때기 위한 것이라며 가즈코를 달래며 여유를 보인다. 이 부분만으로도 우리는 그녀가 어떤 마음의 소유자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자세는 죽음까지도 의연하게 받아들이게 만든다.

반면 나오지는 굉장히 연약한 인물이다. 귀족이라는 계급 때문에 그는 어려서부터 민중들로부터 고립감을 느끼며 황폐해져간다. 이런 성향은 가난이 가정을 덮치면서 더욱 심화되어 의욕과 용기를 상실하고 급기야 군대에서는 마약중독자로 전락한다. 유약한 본성은 어렵사리 마약중독을 치유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크게 바뀌지 않아 곧 다시 알코올중독자가 된다. 한때 유부녀와 사랑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때도 그저 무기력한 태도로 일관한다. 세상과 맞서 싸울 힘이라고는 도무지 없던 그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가즈코는 이런 나오지와 대립적인 캐릭터로 설정된 인물이다. 특히 사랑을 대하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그녀는 첫 번째 결혼에서 실패하지만 이후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아주 적극적인 자세를 견지한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존재라는 주장을 펼치며 유부남인 우에하라에게 아이를 갖고 싶다는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밝히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아이를 갖기까지 한다. 혁명을 국가나 이념과 같은 거대한 개념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 놓인 관습이나 인습의 철폐 같은 의미로 풀이한다면 그녀의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을 갖는다.

마지막으로 우에하라는 우유부단의 전형과 같은 인물이다. 그는 지식인이면서도 모든 면에서 되는 대로 살아간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뜻을 내보이지 않고 매사 체념과 소극적인 자세가 습관화되어있다. 가정을 지키려는 의지도 없고 가즈코와의 사랑을 이루려는 욕망도 보여주질 않으며 술로 하루하루를 소진할 따름이다.

이들의 삶을 통해 우리는 전후(戰後) 일본인들의 의식을 꿰뚫어볼 수가 있다. 하나같이 그들의 가슴속에는 패전국의 국민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허무주의가 넘쳐흐르고 있다. 전통과 윤리관은 무너지고 도무지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사회에서 살아가야하는 젊은이들의 비애가 고스란히 전해져오기도 한다. 물론 다자이 오사무라는 작가 자체의 삶이 그러하다보니 비관적인 색채가 더욱 진하게 덧칠되었겠지만. 새삼 전쟁이라는 것이 비단 그 시기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인간의 삶에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깨닫게 된다.

내용 가운데 유달리 내 눈길을 끈 부분이 있었다. 그건 가즈코가 우에하라에게 편지를 쓸 때 상대를 지칭한 표현이었다. 똑같이 M.C라는 애칭을 썼지만 그 의미는 조금씩 바뀐다. 처음에는 마이 체호프(My Chekhov)였다가 이후 마이 차일드(My Child)가 되기도 하고 마지막에는 마이 코미디언(My Comedian)으로 변한다. 그 변화는 가즈코가 우에하라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를 알려준다. 가즈코는 체호프를 꽤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아내에게 아이를 낳아달라고 말한 그의 일화를 기억하는가 하면, 그의 작품 벚꽃동산의 내용을 소상히 알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이런 배경들을 감안하면 우에하라를 체호프로 칭했을 때는 아마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기대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런가 하면 그의 아이를 낳을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으로 보아 차일드는 그 아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코미디언이라는 애칭은 아이를 갖고 난 후 마지막으로 보내는 편지에서 나온다. 이는 그간에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모든 일들이 한낱 희극에 불과하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자신만은 그렇게 치부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부분이야말로 다자이 오사무가 표현하려던 소설의 주제와 맞닿아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당시 일본 젊은이들의 애정관 내지 결혼관을 숨김없이 보여주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전후시대를 살아가는 그들에게 배우자란 정신적인 동반자이기를 바라지만 단지 종족번식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아 인생 자체를 하나의 희극처럼 만들어버리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닐까? 그렇다면 전쟁이란 인간성을 깡그리 말살해버리는 괴물이 아닐 수 없다. 이로써 무슨 일이 있어도 지구상에서 전쟁이 없어져야하는 이유는 더욱 명백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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