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원광우 Sep 11. 2023

공공근로사업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

 아침운동으로 개천 변을 달리다 한 무리의 인부들을 만났다. 육십 언저리의 중년남자들 일색이었다. 그들은 개천 가장자리에 펼쳐진 좁은 땅에서 말뚝을 박거나 줄을 치는 작업 중이었다. 일부는 흙덩이를 매만지며 밭을 일구는 일도 하고 있었다. 모두가 노란 조끼를 통일되게 차려입은 모습이 공공근로에 나선 사람들이 확실했다. 40대의 젊은 남자가 그 주변을 오가며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아마도 그들을 감독하는 십장이거나 근로사업의 주체인 공무원인 모양이었다. 

 지자체마다 중장년층 실업대책을 우후죽순으로 쏟아내는 요즘이었으니 그 일환이라 생각하면 특별히 이상할 건 없었다. 다만 일꾼들이 모조리 남자로만 구성되어있다는 점이 약간 남달라 보였다. 내가 알기로 으레 공공근로사업이라 하면 풀 뽑기나 화단 가꾸기를 일컬었고, 그런 작업에는 여자들이 동원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조차 오늘의 경우는 힘을 쓰는 일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으니 당연시하며 별 생각 없이 그곳을 스쳐 지났다. 

 잠시 후였다. 달리는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무엇이라도 상상하려는 습관이 본능처럼 발동했다. 그러자 그들에 관한 여러 가지 의문들이 소환되면서 머릿속에서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 그 일자리에 참여하게 되었을까? 근래 들어 그와 관련한 공고문이 내 눈에 띈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벽보나 플래카드를 통해 이루어졌다면 매일 이 주변을 쏘다니는 나의 시야에 포착되지 않았을 리가 없고, 설사 온라인상에서 이루어졌다 한들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는 나의 일상생활공간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그걸 놓칠 리가 없었다. 의문을 품은 배경에는 평소 공무원들을 바라보는 나의 곱지 못한 시선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저 일자리창출이라는 성과만 내면 된다는 생각에 얼렁뚱땅 이루어진 선발은 아닐까? 그들이 어떤 이권에 개입되어 의도적으로 불법을 저지른 것은 아닐지라도 일부 노인단체에서 관공서로 찾아와 떼를 쓰는 바람에 그게 귀찮아서 대충 일자리를 던져줄 수도 있는 일이다. 공무원 사회에 그런 경우는 허다하다. 오죽하면 시도 때도 없이 민원을 제기해 담당공무원을 귀찮게 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말이 내 귀에까지 들려오겠는가.

 비단 앞서 언급한 일들 말고도 노인들과 관련한 사업은 많다. 등하고길 도우미라든가 공원 청소와 같은 일도 있다. 특히 이런 일자리는 소위 꿀 보직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들려온다. 내가 보기에도 그렇다. 거리를 오가다보면 버젓이 등하교길 도우미 복장을 한 노인들이 자신들의 근무지역을 이탈해 시간만 때우는 모습들이 보이는가 하면, 청소용 도구만 든 채 공원의 벤치에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즐기는 노인들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그들이 자신의 일을 다 한 후 휴식을 취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오랜 시간 지켜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것 또한 쉬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노인들에게 쓴 소리를 차마 하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과 공무원들의 배려(?)도 톡톡히 한몫을 한다.  

 공공근로사업의 목적은 일자리 창출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생활이 어려운 노인들에 대한 복지의 개념도 포함되어 있다. 아니 포함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주 목적인지도 모른다. 물론 사업에 참여하는 사람 중에는 독거노인도 있을 것이고 폐지를 주워 생활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건 정작 생활이 어려운 이런 사람들에게 백퍼센트 돌아가야 할 혜택이 상당 부분 누수현상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이다. 과연 그것이 나의 왜곡된 시선이 빚어낸 오류에 불과한 것일까? 

 그 어떤 훌륭한 정책도 완벽한 것이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일로 법을 만든 국회의원들과 집행하는 공무원들만 싸잡아 비난하는 건 옳지 못하다. 거기에는 우리 같은 시민들도 관여되어있다. 무엇보다 대상이 아님을 알면서도 사업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참여한 사업에서 맡겨진 일을 게을리 하는 사람들의 책임이 가장 크다. 나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만약 나에게 그런 꿀 보직의 일자리가 주어진다면 난 서슴없이 그 꿀을 탐닉하려 매달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다소 심한 표현이 될지는 모르지만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남의 기회를 박탈하는 도둑이며 남의 생을 빼앗는 파렴치한에 다름 아니다. 아울러 일자리를 제공하는 공무원들 역시 철저하게 원칙과 기준에 근거를 둔 선발과 감독을 행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자신만을 생각하다보면 항상 이런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시선을 자신에게만 집중하기 때문에 남들을 향한 배려심을 발휘할 틈이 없어진다. 어쩌면 오늘 공공근로사업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사실은 거기서 내가 배제되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가장 반성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다. 남들의 잘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나부터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버릇을 들일 필요가 있다. 분명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바꾸어 생각하면 어떨까? 나 아닌 타인을 나의 가족이나 친구들이라고. 그게 더 어려울 수 있지만 어쨌든 그리만 된다면 나만 생각하는 욕심이 조금은 줄어들 수도 있을 것이다. 매일같이 내가 지향하는 관대한 사람이 되는 첩경은 그곳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

작가의 이전글 슬기로운 해외미술관 관람방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