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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광우 Sep 15. 2023

풍다우주(風茶雨酒), 우리 부부를 위한 사자성어

 장마철이다. 후덥지근한데다 공기의 무게가 퍽이나 무겁게 느껴진다. 무거워진 공기는 나를 짓누르며 기분마저 저기압이 되게 한다. 불쾌지수가 상승하면서 우울해진다. 괜스레 옛 생각에 빠져든다. 만족스럽지 못한 현재 상황들이 아름다웠던 과거의 추억을 소환하는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왜 현재는 온통 불만투성이인데 과거는 누추한 기억들조차 그리움과 미련을 자아내는 것일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불가역성 때문일까? 그렇다면 오늘의 이 불만들도 시간이 흐른 훗날 돌아보면 덧칠되어 아름답게 기억될까? 

 비라도 확 쏟아졌으면 좋겠다. 쏟아지는 폭우를 바라보며 혼자서 호젓하게 낮술이라도 한 잔 하고 싶다. 술잔을 기울이며 주체할 수 없이 밀려드는 과거의 추억들을 천천히 곱씹어 보았으면. 어쩌면 술기운에 기대어 불만스럽기만 한 현재의 삶으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고픈 돌발적인 충동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중충한 날씨가 우울감을 불러오는 바이러스라면 비와 술은 현실을 망각케 하는 치료약일 테니까.  

 비가 오는 날 마시는 술은 감정을 증폭시킨다. 빗물이 어울려 물길을 형성하듯 술기운은 몸속으로 퍼지면서 여러 종류의 감정들을 깡그리 끌어 모은다. 비는 폭우로 변하고, 내(川)가 되고 강을 이루던 물길은 마침내 범람한다. 과거를 회상하는 동안 내 감정들도 북받쳐 주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다 끝내 폭발하고 만다. 비가 그치면서 평온을 되찾은 강은 그 바닥이 한층 정갈해진다. 한 차례 열병을 앓은 내 마음 역시 앙금들이 가라앉으며 카타르시스가 찾아온다. 그런 면에서 비와 술은 비록 걸러내는 물질이 다르긴 해도 모두 여과지에 다름 아니다. 여과지를 통과한 나의 현재는 초라한 색을 벗으면서 아름다운 과거로 변한다. 그러면 난 과거가 된 현재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가 있다.  

 내 삶의 모든 부분이 이렇게 예쁜 색깔들로 채색되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내 삶의 시간표에는 이미 색칠된 과거와 현재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미처 색칠하지 못한 미래라는 놈도 존재한다. 놈은 잠시의 틈도 허락하지 않고 끊임없이 밀려온다. 미뤄둘 수도 없고 늦추어볼 수도 없다. 무슨 색을 입힐까 고민하기도 전에 사정없이 파고들 뿐이다. 난 그저 허둥대다가 어영부영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미래를 개척해나간다지만 나에게는 그냥 견뎌내는 과정에 불과하다. 견디는 일이 습관화되다보니 무력하게 무너져 내리는 일도 일상화된 지 오래다. 포기하고 또 포기하고, 욕심을 버린다는 핑계로 희망마저 버려버린다. 그렇게 미래는 무의미하게 다시 현재로 과거로 바뀌어간다. 내 가슴에는 다시 응어리가 생기고 그 크기는 점점 커진다. 지금 난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러있다. 

 일기예보에서 오늘은 비가 많이 올 거라고 한다. 이번에는 태풍까지 동반하여 폭우가 쏟아질 예정이라고도 한다. 고개를 내밀어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이 온통 시커먼 먹구름에 휩싸여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져 내릴 듯하다. 최첨단의 슈퍼컴퓨터가 동원된 기상예보이니 틀릴 리 없을 것이다. 난 다시 서서히 감상에 빠져든다. 클래식의 선율이 방안에 흐른다. 바흐의 피아노소나타도 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다.

 아니나 다를까 바람이 이는 듯하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빗방울은 점점 굵어진다. 바람도 거세진다. 열린 창으로 스며든 바람이 내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가슴속에 구멍이 뻥 뚫리며 텅 비어버린다. 아까부터 조금씩 환상처럼 피워 오르던 과거의 기억들이 구체성을 띄면서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대학시절의 캠퍼스가 떠오르고, 불가능이라고는 없던 그 젊은 날이 떠오르고, 생동감 넘치던 여름 농활이 떠오른다. 

 노크소리가 들렸다. 대답을 하기 무섭게 빼꼼 문이 열리면서 아내의 얼굴이 나타났다. 웬일인가 싶어 동그랗게 눈을 모으는데 아내의 말소리가 이어진다. 막걸리나 한 잔 안 할래요? 바람이 불면 차, 비가 오면 술, 풍다우주(風茶雨酒)라 하잖아요? 이심전심이었을까? 

 덕분에 오늘도 술을 마신다. 그러나 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오늘 마시는 이 술 한 잔이 나의 과거와 현재뿐 아니라 미래까지도 걸러 줄 것이라고. 그러면 또 꼭 그 만큼 내 우울증은 해소가 되고 다음 비가 오는 날까지는 열심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비가 오는 날, 내가 술꾼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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