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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광우 Sep 24. 2023

우리 동네 경로당

 점심으로 뭘 먹을까? 통 입맛이 없네. 아내의 목소리에는 더위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입맛 핑계를 대고는 있었지만 반복되는 가사에 싫증이 난 게 틀림없었다. 육십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삼식이 구실을 톡톡히 하는 나를 남편으로 두었으니 말하자면 그건 일종의 업보였다.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 역시 식욕이 동하지 않은 상태였다. 인심을 쓴답시고 기껏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외식이었다. 그럼 요 근처 어디 가서 냉면이나 한 그릇 먹을까?

 그렇게 집을 나서 식사를 마쳤을 때였다. 달랑 점심만 해결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쉬웠던지 아내는 커피를 한 잔 하고 가자고 말했다. 마침 식당 바로 앞에 카페 간판이 보였다. 제법 넓어 보이는 것이 잠시 쉬어가기에 안성맞춤이란 생각이 들었다. 별다른 고민 없이 난 아내의 손목을 잡고 그곳으로 향했다. 

 카페는 문을 여는 순간부터 우리의 상상을 초월했다. 넓은 공간이 사람들로 가득 찬 게 동네카페임을 무색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들이 나누는 대화소리는 시골장터를 연상케 했다. 대부분의 손님이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라는 점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편안히 쉬어가는 것이 아니라 소음에 시달릴 게 뻔했다. 생각하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이 난 돌아섰다. 그때 아내가 가만히 내 팔을 잡아당기며 손가락으로 매대 위에 걸린 메뉴판을 가리켰다. 거기엔 아메리카노라는 품목이 유난히 큰 글자로 박혀있었다. 이천 원이라는 가격과 함께. 다른 카페의 반값도 안 되는 그 가격은 소음이라는 악조건을 상쇄시키기에 충분한 당근이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실로 컸다. 무엇보다 도무지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 아내와 내가 소통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소음을 굴복시킬 수 있는 보다 높은 데시벨이 필요한데 우리의 목청역량은 거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급기야 우린 대화를 포기한 채 각자 자신의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귀에 이어폰을 꽂았고 난 폰의 화면을 켜 그 속에 저장해둔 전자책을 펼쳤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옆자리에서 의문스런 풀피리 소리가 났다. 어린 시절 기다란 풀잎을 입에 베어 물고 내던 바로 그 소리였다. 고개를 돌렸더니 한 무리의 할머니들 가운데 한 사람이 빨대를 입에 물고 있었다. 풀피리는 바로 그 빨대였다. 신기한 재주를 선보인 탓에 주변의 시선이 죄다 그쪽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 무리 중의 일부는 자신도 흉내를 내보려 애를 쓰고 있었다. 주인공 할머니는 아주 자랑스럽게 문하생들에게 자신만의 연주비법을 전수하기까지 했다. 어려운 기술은 아니었던지 곧 그 주변은 풀피리 오케스트라로 변했다. 덩달아 여기저기서 호기심을 참지 못해 빨대를 입가로 가져가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소음에 더해 연주회까지 벌어져 실내는 카페가 아니라 아수라장에 가까웠다. 

 그때 갑자기 홀 한가운데서 굉음에 가까운 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 그쪽을 쳐다보았다. 나 여시 마찬가지였다. 그곳에는 한 할머니가 두 눈을 부라린 채 학창시절 꽤나 껌을 씹었을 듯한 자세로 꼿꼿이 서서 의자를 바닥에 마구 부비며 소음으로 소음을 제압하려는 몸짓을 보이고 있었다. 말이라고는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지만 그건 누가 봐도 난장판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였다. 곳곳에서 웅성거림이 일었지만 할머니의 카리스마에 거대한 소음의 물줄기는 한풀 꺾여들었다.

 하지만 진정국면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낚시꾼의 미끼를 물었다 구사일생 살아난 물고기가 금방 그 사실을 잊어먹고 다시 미끼를 물 듯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던 사람들은 어느새 일진 할머니의 존재를 잊어갔다. 오히려 할머니가 못 이겨 자리를 뜨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했다고나 할까? 소음에도 면역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난 그럭저럭 그 카페만의 분위기에 익숙해져갔다.

 잠시 후 이번에는 반대쪽 옆자리에서 대화를 나누던 한 쌍의 할머니가 한 곳을 응시하면서 짜증스런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이 시끄러워. 꼭 저래 크게 음악을 틀어야 들리나, 원. 할머니의 시선이 가닿은 쪽에서는 불만의 이유를 설명하듯 혼자 앉은 할아버지의 핸드폰으로부터 팝송의 선율이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팝송의 음향은 카페에서 자체적으로 틀어놓은 음악소리뿐 아니라 실내의 소음을 가소롭게 만들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불만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할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던 내 눈에 약간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다. 할아버지의 귀에 이어폰이 꽂혀있었던 것이다. 분명 할아버지의 의도는 이어폰을 통한 음악 감상일 테지만 기기의 이상으로 그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온 것이 틀림없었다. 이어폰을 통해 소리가 잘 들리지 않으니 점점 볼륨을 키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리라. 나 또한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지 않던가. 난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할아버지 곁으로 갔다. 할아버지 이어폰을 잘못 꽂으신 것 같아요. 제가 한 번 해볼게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던 할아버지는 나의 손놀림으로 이어폰을 통해 음악이 들려오자 금방 상황을 알아차리고는 주변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목례를 보냈다. 짜증을 내던 할머니들의 인상이 활짝 펴지는 순간이었다. 

 자리에 돌아오자 아내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동네 경로당이 따로 없네. 당신이 이 경로당 회장 한 번 맡아보는 건 어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때부터 이상할 정도로 모든 소음들이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사람들 목소리 하나하나에 정겨움이 묻어났다. 덕분에 난 아주 기분 좋은 상태로 카페를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며칠 후였다. 점심때가 다 되어갈 무렵이었다. 아내가 나를 불렀다. 여보, 오늘 점심으로 냉면 어때? 간 김에 동네 경로당도 한 번 들러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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