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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광우 Sep 27. 2023

내 이름은 빨강 - 오르한 파묵

 ‘나는 지금 우물바닥에 시체로 누워있다. 마지막 숨을 쉰지도 오래 되었고 심장은 벌써 멈춰버렸다.’ 소설은 그 시작부터가 예사롭지가 않았다. 화자는 죽은 자였다. 자연스레 그 문장은 나로 하여금 제목과의 연관성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빨강은 피의 색깔이다. 죽음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이 이루어질 것 같았다. 전반적인 분위기가 어두워질 것 같은 예감에 책을 잘못 선택했다는 후회가 일었다. ‘순수박물관’, ‘하얀 성’, ‘제브데트 씨와 그 아들들’ 등을 통해 파묵과는 제법 친하다 여겼건만 잘못된 생각이었을까? 몇 페이지 지나 세큐레와 에스테르가 새로운 화자가 되자 연애소설의 냄새가 강하게 풍겨났다. 그럼 그렇지. 다시 흥미가 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페르시아와 오스만제국 왕조의 이야기가 미술이라는 예술과 겹쳐지면서 슬슬 지루해졌다. 잘 알지도 못하고 쉽지도 않은 분야였다. 책을 읽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심지어 며칠 동안 책상위에 내팽개쳐두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이따금 이왕 읽었으니 끝을 봐야 한다는 의무감이 고개를 쳐들었다. 결국 그것이 책을 완독하게 하는 힘이 되었다. 삼주일이라는 긴 여정이 책읽기에 투입된 건 그런 과정을 거친 덕분이다. 

 읽기를 어려워한 만큼 소설의 정체성은 모호하다. 글쎄 역사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고 예술소설이라 할 수도 있으며, 종교소설이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추리소설이나 연애소설이라 이름 붙인들 하나도 어색할 것이 없다. 그만큼 소설이 다루는 분야는 넓고 방대하다. 그렇다고 그 깊이가 얕은 것도 아니다. 16세기 무렵의 페르시아와 오스만 제국의 역사가 배경으로 펼쳐지는가 하면 이슬람 종교에 관한 의식과 체계들이 다양하게 언급된다. 또 서양으로 대변되는 베네치아의 미술과 동양으로 대변되는 오스만의 미술이 대비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전통적 미술을 고수하려는 무리와 개혁하려는 무리들 사이에 전개되는 대립도 다루어진다. 대립은 살인으로까지 이어지고 소설 속에서는 부분적으로 살인범을 추적하는 일종의 스릴도 긴장감 넘치게 묘사된다. 그 사이사이에 인간사에 빼놓을 수 없는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 또한 적절하게 녹아든다. 

 누가 뭐라 해도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다중화자를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각 장(章)별로 매번 화자는 바뀌며 중요한 등장인물 모두가 화자로 등장한다. 내용의 중심이 살인자 추적에 있음을 감안할 때 이런 점은 마치 퍼즐을 한 조각씩 맞추어가며 수사를 진행하는 듯한 느낌마저 갖게 한다. 또 시종일관 1인칭시점을 유지하고 있지만 중요인물들의 마음속이 모두 드러남으로써 전지적 작가시점과 같은 효과를 내기도 한다. 심지어 개나 말, 나무, 금화와 같은 동물이나 무생물이 화자가 되기도 하고 빨강이라는 색채까지 화자로 등장한다. 인간이 아닌 그것들은 인간세상을 풍자하는 도구로 활용된다. 그림의 가치를 돈으로 치는 세상, 욕심과 시기, 질투, 거짓 등이 판을 치는 세상이 그들에 의해 여지없이 비판된다. 

 소설은 엘레강스라는 궁정의 세밀화가가 살해되어 우물 속에 버려지는 사건이 발단이 된다. 당시 에니시테는 술탄의 지시로 밀서(密書)를 제작하고 있었는데 그 책에 삽입될 그림을 그리기 위해 세밀화가들을 선발한다. 올리브, 나비, 황새 같은 사람들이 그들이며 엘레강스 또한 그 일원이다. 그들은 밀서에 전통에서 벗어나 베네치아 화풍을 적용하고자 한다. 둘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터키의 미술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평면적인 신의 시각을 고집하는데 반해 베네치아 기법은 원근법을 사용하여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인간의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예술개혁은 반발에 부딪친다. 이로 인해 화원들 사이에 반목과 갈등이 야기된다. 왜냐면 오스만과 같은 궁정화원장을 포함해 당대의 화가들은 일반적으로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는 동양예술에 비해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서양예술이 저급하다는 시각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엘레강스의 희생 역시 이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이 과정에서 파묵은 이슬람국가 중에서도 터키 예술의 우수성을 은근히 내비치기도 한다. 그는 엘레강스나 에니시테의 죽음을 단순히 취급하지 않고 터키미술의 혁신을 위한 희생양으로 삼는 듯한 강한 인상을 준다. 

 중간 중간에 이슬람의 종교관과 세계관이 드러나는 점 또한 이 소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장례식을 치르는 장면을 통해서는 이슬람의식을 엿볼 수 있으며 죽음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도 알 수 있다. ‘죽은 자들의 왕국에서 진정한 행복은 육신이 없는 영혼이라면, 산 자들의 영토에서 가장 큰 행복은 영혼 없는 육신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죽은 다음이 아니면 알 수가 없다.’ 이런 문장을 통해서는 영혼과 사후세계를 믿지만 여전히 의문을 품고 있다는 사실 또한 느낄 수 있다. 다만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이런 내용들의 난해성이 가독성을 떨어뜨린 점은 아쉬움으로 계속 남았다. 

 결혼관이나 남녀 차별 같은 시대적 상황이 그려지는 점은 여느 소설과 다를 바가 별로 없다. 카라는 에니시테의 딸 세큐레를 어린 시절부터 사랑해왔다. 그러나 에니시테의 반대로 결혼에 이르지 못하고 세큐레는 기마병과 결혼한 후 남편의 실종소식을 접한다. 이후 세큐레는 마치 시댁의 소유물처럼 취급된다. 실종되었다는 이유로 이혼도 할 수 없고 마음대로 독립생활을 유지하지도 못한 채 시아버지와 시동생의 살림꾼 역할을 강요당한다. 남녀관계에 있어 봉건적인 사회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세큐레를 향한 시동생 하산의 맹목적인 사랑과 카라와 재혼하려는 세큐레의 의도와 달리 딸을 자기 곁에 계속 두고 싶어 하는 에니시테의 심정, 마지막에야 밝혀지는 세큐레에 대한 올리브의 짝사랑, 세큐레와 카라가 마침내 결혼에 골인하기까지의 과정 등은 당시 남녀 간의 애정관과 결혼제도에 대해 많은 것을 미루어 짐작하게끔 한다. 아울러 이런 부분들이 나름의 재미와 감동을 선사해주었다는 점 역시 부인할 수 없다.

 우여곡절 끝에 책을 다 읽고 나자 다른 어느 때보다 후련함이 가득 차왔다. 아마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끝까지 참고 읽어냈다는 대견함 때문일 것이다. 문득 어떤 작가와 사적인 자리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른다. 그는 소설의 목적을 이렇게 정의했다. 재미를 선사하거나 지식을 전해주거나 위로를 안겨주는 것이라고.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소설은 나에게 재미나 위로보다는 지식을 전해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슬람이라는 문화와 예술에 대해 그나마 눈을 뜨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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