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결혼 같은건 하지 않을꺼야

차라리 돈을 벌거야

by 인성미남

"사는 것도 모르거늘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공자-


고인에 대한 추모는 어느새 슬픔에서 벗어나 마을 잔치 의 성격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어제 오신 문상객들 중에는 화투를 치시며 상갓집에서 저리 웃어도 되나 할 정도로 즐거워하셨고 어떤 문상객들은 마치 술에 원수 진 사람들처럼 경쟁적 으로 술병을 비워나가고 있었다.

방 하나를 두고 어떻게 이렇게 대조적 일 수가 있을까?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는 이 묘한 그림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호상( 好喪 )의 뜻처럼 '복을 누리고 오래 산 사람의 상사'이니 무작정 슬픈 것이 아닌 기쁨도 함께 어울리는 그야말로 복 중에 복을 누리시고 고인의 마지막도 복을 받으시라는 의미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문상객들이 올 때마다 상주는 곡(哭)을 하며 고인의 살아생전 도움받은 분들과 기억하는 분들에게 대한 고마움을 정중히 표하고 조문을 하는 문상객들은 고인의 살아생전 기억과 추억들을 함께 떠올리며 고인의 가족들에게 마음을 다해 위로의 말들을 건넸다.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고맙습니다 바쁘신데 이렇게 와 주셔서"

" 아버님이 살아계실 때 참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 네 감사합니다"


나도 언젠가는 상주가 되어 두줄의 검은색이 그려진 완장을 차고 아버지를 기억하고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는 분들에게 예를 다하는 날이 올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지금 장례를 치르고 있는 상주처럼 슬픔을 표현하는 곡(哭)을 하며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온 마음을 다해 슬픔을 표현할 수 있을까? 내 마음에 슬픔이 없다면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흐르지 않는다면 조문을 와주신 문상객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몹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문상객 들 틈에 자리 잡으시고 하루종일 거나하게 술을 드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들의 한 조각이 다 식어 버린 국밥의 밥알이 되어 목구멍 속으로 미끄러져 갔다.


학교를 마치고 작은 아버님 댁으로 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여동생은 이미 학교에서 돌아와 사촌 여동생과 머가 그리 좋은지 연신 웃어대며 놀고 있었다.


" 언니야 이 인형 예쁘제"

" 윽수로 이쁘다. 이거 어데서 샀노?"

" 울 엄마가 어제 시장 갔다가 사 왔다"

" 인형 옷도 마이 사왔데이. 봐라 이쁘제?


바비 인형이었다. 공주님 같은 예쁜 옷들을 이것저것 갈아입히고 놀 수 있는 그 또래 여자 아이들의 최고의 장난감이었다. 여동생은 인형 같은 걸 가지고 놀지 않았다. 인형을 선물 받아 본 적도 없었고 유일한 장난감은 어머니가 헌 책방에서 사 오신 세계위인전기 전집 50권이었다.얼마나 많이 봤는지 몇 권은 어머니가 테이프로 붙여놓을 정도로 여동생은 세계위인전기 전집을 무척이나 아끼고 좋아했다. 물론 나도 꽤나 많이 읽었다. 어찌 보면 지금의 나의 생각이나 가치관이 그때 읽었던 '세계위인전기전집'에서 새워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여동생이었으니 사촌 여동생이 선물로 받은 바비 인형이 무척이나 좋아 보이고 부러웠을 것이다.


" 오빠야 왔나?"

" 응 학교 잘 갔다 왔나"

" 응 잘 갔다 왔다. 작은 엄마가 짜장면 만들어서 한 그릇 묵었다."

" 오야 잘했다. 니 숙제는 없나? 숙제하고 놀아야 안되나?"

" 아까 오자 마자 퍼뜩 다하고 놀고 있다 아이가"

" 오빠야 난중에 오빠야 돈 많이 벌면 내 맛있는 거 랑 예쁜 옷 많이 사 줄기제?"

" 오야 내 난중에 돈 많이 벌면 억수로 많이 사줄게 진짜 약속한데이"


동생은 어쩌면 나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대신 사달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오빠야' '오빠야' 하며 내 뒤를 쫄쫄 따라다니던 여동생은 이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내년이면 큰아이가 대학을 들어갈 정도로 중년의 아줌마가 되어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중년의 아줌마의 오빠인 나는 지금까지도 억수로 돈을 많이 벌지 못해

동생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맛난 거 와 예쁜 거 그게 머라고 못 사주고 못해주겠냐 만은 그것보다 동생에게 못해준 것들에 대한 마음의 빚이 항상 마음에 맺혀있다.


" 어서 씻고 와서 밥 무래이 머 해주꼬?"

" 짜장면 해주까? 아이면 볶음밥 묵을래?"

" 아무거나 요 "


작은 어머님이 신경 써서 해주신 저녁밥은 짜장면도 볶음밥도 아닌 잡채밥이었다.

그것도 돼지고기가 큼직 막 하게 썰어져 엄청 많이 들어간 맛있게 볶아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잡채밥이었다.


"그래 엄마는 언제 오신다 카드노?"

". . . . . . . "

"와? 오늘 못 오신다 카드나?"

" . . . . . . ."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데 오늘 오실지 내일 오실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작은어머님의 질문에 고개만 숙인 채 그렇게 맛있던 잡채밥을 아무 맛도 못 느끼며 입안으로 꾸역꾸역 끌어 넣기만 했다.


" 너무 걱정 말거라"

" 오실 때 되면 오시겠지"

" 어서 묵고 조금 놀다가 자거래이"

" 방이 불편해가 우짜노 그래도 니가 좀 참고 동생 걱정 안 하게

잘 데불고 자거래이"


잠이 오지 않았다. 엄마가 걱정돼서 잠이 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시면 엄마에게 손찌검을 하셨다. 자식들이 보고 있든 아니든 안중에도 없으신 분이셨다. 마치 나의 아버지가 아닌 다른 곳에서 불쑥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깡패처럼 느껴졌다. 제발 아무 일 없어야 하는데. 내가 집에 가면 엄마가 더 힘들지도 몰라.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버지는 나와 여동생에게는 손찌검을 단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었다.

그것만큼은 아버지도 자식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신 건지 모르겠지만,

그저 화가 나시면 큰소리로 나가 있으라고 하시는 정도였다.

어린 마음에 생각을 많이 했다.


' 난 어른이 되면 결혼 같은 건 하지 않을 거야' ' 그냥 엄마랑 같이 살 거야'

'아버지는 제발 사라지셨으면 좋겠어' ' 아버지가 못 찾는 곳으로 가서 엄마랑 살 거야'


내일 학교에서 또 수업료 안 낸 사람으로 교무실에 불려 가도 난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힘들게 학교를 다녀야 한다면, 차라리 돈을 벌려 가는 게 엄마와 여동생에게 더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밤새도록 하고 또 했다.

몇 년 후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는 한참 사춘기를 겪고 있는 나에게 분노장애라는 마음의 병을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

그날 우리 가족의 울타리가 산산조각 나던날 의 시작은

어머니가 힘들게 남의 집 파출부 일을 하며 모아둔 생활비와 나와 내 동생의 수업료와 우유급식비를 하룻밤 술값으로 탕진하신 아버지 때문이었다.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어른의 무책임한 모습이 나의 아버지의 모습이었으며,

그로 인해 어린 마음에 심어진 세상에 대한 분노와 비뚤어진 가족애는 험난한 내 삶의 전주곡이 되어 슬프고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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