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실속의 화초
-안티파네스-
아침 겸 점심 겸 국밥 한 그릇에 소주 한 병을 놓고 조용히 잔을 비우고 있을 때
상갓집 별채 방에서 고성이 들렸다.
" 내가 멀 그리 잘못 했노"
" 행님요 인자 술은 그만 묵고 방에서 주무시소"
" 내 하나도 안 취했다. 내가 벌초 도 다 하고 집안 대소사는 거의 다 챙긴 거 모르나?"
" 압니다 알다 마다요. 누가 행님 한테 머라 캅니까?"
" 내가 돈 도 없고 늙었다고 무시하는기가? 어이"
" 와 이캅니까 행님 누가 행님을 무시했다고 이캅니까"
내가 나서야 할 듯 보였다. 아버지가 술을 많이 드시긴 했다. 하셨던 말씀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하시는 걸 보면 이미 많이 취하셨다.
고향 어르신 들과 말다툼을 하실 이유가 없었는데, 아버지는 무언가에 기분이 나쁘셨고
고향 어르신 모두에게 주사를 부리고 계셨다.
"야야 느그 아부지 술 많이 드셨다 어여 옆방으로 모시고 가서 주무시게 해라"
"네 어르신. 죄송합니다. "
" 죄송할게 머있노 술이 웬수지 행님이 술만 드시면 케케묵은 옛날이야기를 다 끄집어 내니
우짜겠노 퍼뜩 모시고 드가라"
아버지를 업고 옆방으로 가기 위해 제대로 몸도 못 가누시는 아버지를 일으켜 세우고는
한 번에 업고 별채 방을 나섰다.
너무 가벼웠다. 아버지를 업는 순간 너무 가볍게 업히시는 것을 느끼곤 알 수 없는 찡한 감정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 순간 나는 단 한번 아버지를 업어본 기억이 없었다는 것을 떠올렸고. 또한 나 역시 아버지의 등에 업혀본 기억이 없다는 것을 떠올리며 더 씁쓸한 감정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나의 등에 업히시고는 조용해지셨다. 아마 주무시는 듯했다.
나의 등이 편안해서였을까? 아니면 아들의 등에 처음으로 업히신 게 좋으셔서 잠든 척하신 걸까? 나는 마당에서 한참을 아버지를 등에 업고 서있었다.
상갓집 담장 밖으로 노을이 지는 게 보였다. 가을걷이가 끝난 황량한 들판 너머 어스름 산세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노을이 온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머하노 아부지 감기 걸리시겠다. 퍼뜩 모시고 방에 드가라"
마을 어르신의 말씀에 짐짓 놀라 서둘러 아버지를 업고 방으로 들어갔다.
문지방을 넘어서자 두툼한 솜이불과 깨끗해 보이는 요가 정갈하게 깔려 있었고
혹시 깨실까 봐 조심스럽게 아버지를 눕혀 드리고는 아버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른기침을 간간히 하시며 주무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어릴 적 기억이 또 하나 스쳐 지나갔다. 술을 엄청 드시고 집에 오셔서 늘 그랬듯이 어머니에게 화풀이를 하시다 새벽이 다 되어서야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 버리신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방바닥에 널브러진 소주병과 성한 곳이 없는 밥상이 나뒹굴고 있는 그 모습이 고스란히 주무시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과 겹쳐졌다,
작은아버님 댁에서 엄마 걱정에 쉽사리 잠들지 못했던 그날 늦은 밤에 엄마가 조용히 나를 흔들어 깨웠다. 뒤척이다 잠깐 잠이 든 탓에 금방 몸을 곧추 세우곤 눈을 비비며 말했다.
" 엄마" " 엄마 개안나" " 엄마 언제 왔노?"
" 괘않타. 엄마는 괘않타."
" 엄마"
어린 마음에 엄마를 걱정했던 마음이 한꺼번에 눈물이 되어 쏟아지며 엄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괘않타. 괘않타."
엄마는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제법 어깨가 벌어진 마음만 어린애 같은 아들을 꼭 안아 주셨다. 눈물이 멈추지가 않았다. 엄마의 반가운 살냄새를 맡으며 연신 눈물을 훔쳤다.
" 인자부터 엄마가 하는 말 잘 듣거래이"
"응 엄마"
" 엄마는 집에 안갈끼다. 엄마는 돈을 벌려 가야 되니까 니가 힘들어도 동생 잘 데리고
당분간 작은아버지 집에서 좀 있거라"
" 와 집에 가면 되잖아 엄마" " 여는 불편하다 엄마"
"안다 엄마도 안다" " 한 달만 힘이 들어도 한 달만 참고 있거라"
"엄마가 한 달 후에 꼭 다시 데리러 올게 알았나?"
"작은 엄마가 도시락도 싸주고 밥도 해주고 할끼다. 알았제?"
엄마의 강한 다짐에 나는 더 이상 투정을 부릴 수가 없었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엄마의 단호함 과 울음을 꼭꼭 씹어 삼키는 듯한 약속에 나는 말없이 눈물을 훔치며
고개만 끄덕였다.
어둠은 슬픈 듯 밝아오는 아침에게 소리 없는 인사를 하곤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고
엄마는 일찍 일어나신 작은아버님과 잠깐의 이야기를 나누시곤 아직 곤히 잠들어 있는
여동생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시다가 말없이 문을 열고 나가셨다.
나 와 동생은 창고 방에 걸린 달력을 보며 엄마가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학교도 가기 싫었고 작은 아버님 댁에도 있고 싶지 않았다.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만 계속 되풀이할 뿐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서 돈을 벌고 싶었다.
할 줄 아는 건 학교 다니고 공부하고 그게 다였던 철부지 고등학교 1학년이 무슨 돈을 벌 수 있을까? 온실 속의 화초는 온실을 나서는 순간 금세 시들거나 죽게 된다. 화초를 감싸고 있던
따뜻함과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에서 벗어나는 순간 모진 바람과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절명(絶命)하고 만다. 바람에 흔들리지도 , 추위에 떨지도 않았던 엄마라는 온실의 보살핌이 사라진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화초 같았던 나는 다가올 매서운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