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 새긴 마음하나
까까머리 낭랑 18세 서울 가다
마을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상갓집 저녁은 고인의 발인을 하루 남겨 둔 터라 멀리서 조문을 하러 오신 새로운 문상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고인의 살아생전 인덕 때문인지 상갓집 문턱이 닳아 없어질 듯 많은 문상객들이 조문을 하고 상주는 꼬박 밤을 새우고도 여전히 피곤한 기색 없이 예(禮)를 다해 문상객 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슬픔은 어스름 달빛을 가리고 있던 구름 이 걷히듯 걷혀 가고 있는 것 만 같았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상갓집 마당에서 추운 줄도 모르고 하얀 백구와 장난을 치며 놀고 있었다. 봉제오리 인형을 이리저리 던지면 하얀 백구는 지친 기색도 없이 냉큼 물어와 아이들에게 다시 던져 달라고 꼬리를 흔들었다. 봉제오리 인형은 백구의 인정사정없는 깨물림으로 커다란 상표가 달려있는 마크가 덜렁거리고 있었다.
누군가에 손으로 튼튼하게 붙여 놓았을 커다란 자수로 만든 마크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 동대문 평화시장 자수마크 상가 19호'
서울역에 내린 나는 손에 쥐어진 종이쪽지에 쓰인 주소 하나가 전부였다.
어머니께서 친하게 지내셨던 언니 분이 서울 평화시장에서 옷에 붙이는 마크를 기계로 자수하는 공장을 하고 계시다고 했고, 마침 일자리가 있다고 걱정 말고 나를 보내라고 하셨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 무렵 대구에 있는 아파트 공사장에서 인부들 밥을 해주시는 '함바집'(공사장 숙소 근처에 인부들에게 식사를 만들어 주는 임시식당 의 일본말 표현)에서 식당일을 하셨고 여동생과 함께 식당 옆 임시 건물에 숙소에서 생활하고 계셨다. 여동생과는 어찌어찌 숙박을 해결하고 계셨지만 나까지 함께 살 수 있는 환경은 되지 못했다. 어머니는 가슴에 큰 멍울을 삼키고 하나뿐인 아들을 그렇게 타지로 보내셔야 만 했다.
어떻게든 종이쪽지에 적힌 곳으로 가야 했는데 어떻게 가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18살. 대구에 살던 까까머리 고등학생이 복잡한 서울 지하철을 타려고 하니 막막했다.
서울사람들은 왜 그렇게 발걸음이 빠른지 지나가는 어른에게 종이쪽지를 내밀고 길을 물어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 서울 가면 이상한 사람도 많다고 하니까 단디하고 절대로 돈 같은 거 보이지 말고 "
어머니의 걱정 어린 당부를 마음에 새기고는 '동대문 역'부터 찾았다.
동대문역에서 내려서 평화시장으로 가면 자수상가 가 있다고 했는데.
알음알음 물어물어 평화시장 자수상가에 도착하니 번호판이 즐비한 상가가 눈에 들어왔다. '마크집 19호'
요란하게 돌아가는 자수기계 소리와 함께 어머니의 친한 언니분이 반갑게 나를 맞으셨다.
" 어서 와 온다고 힘들었지? 밥은 먹었니?"
" 네 안녕하세요. 아직 못 먹었어요"
" 배고프겠다 우선 밥부터 먹자"
아주머니는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남편이신 듯한 분께 자초지종을 설명하시곤
내 손을 잡고는 근처 백반집으로 데리고 가셨다.
" 네 엄마한테는 이야기 들었어. 고생이 많구나 네가. 어린 나이에"
" 그래 아줌마가 하는 일은 어떤 일인지 알고는 온 거야?"
나는 아침부터 제대로 먹은 것이 없던 차라 차려진 음식을 허겁지겁 먹으며
고개만 저었다.
"체 하겠다. 천천히 먹어 더 먹고 싶으면 얼마든지 더 먹고"
한없이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는 상냥한 서울말로 허겁지겁 공깃밥 세 그릇을 비워내는
나에게 연신 걱정 말라는 말만 하고 계셨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정신없이 밥을 먹고는 아주머니 와 함께 다시 자수공장으로 향했다.
아주머니는 자수공장으로 향하는 동안 동대문 평화시장의 풍경을 하나둘 설명해 주셨다.
"일단 오늘은 무슨 일인지 만 보고 온다고 피곤했을 테니 이따가 일 마치고 퇴근하는 아이들과 함께 숙소로 가서 쉬고 있어. 그럼 아줌마가 저녁에 숙소에 가서 지낼 곳과 필요한 것들을
챙겨줄게"
요란한 자수기계 소리 속에서도 상냥하고 따뜻한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쉴세 없이 좌우로 움직이는 자수기계 너머로 내 또래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힐끔힐끔 쳐다보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 지수야 이리 와서 인사해 내일부터 같이 일할 친구니까"
" 네 사장님! "
" 안녕 나 지수라고 해."
예쁘장하게 생긴 단발머리 여자아이는 씩씩하게 내게 인사를 걸어왔다.
" 어. 아 아 안녕."
숫기 없는 까까머리 18세 남자아이는 부끄러워하며 인사를 했다.
" 이따가 나 일끝 나면 같이 숙소로 가자 나랑 같이 가면 돼"
" 그..래..알았어"
동대문 평화시장의 자수공장 의 오후
작은 창문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햇빛에 자수바늘이 반짝였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날카로운 바늘을 피해 풀려버린 실을 다시 걸어주는 자그마한 여자아이의 손은 쉴틈이 없었다. 여러 가지 색상의 마크는 번갈아 가면서 그 색상의 맞는 실을 걸어주어야 했다. 왠지 멋져 보였다. 찰랑거리는 단발머리를 흔들며 여러 자수 기계를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세상 물정 모르는 18세 까까머리 고등학생의 눈에는 엣띤 모습을 한 어른 여자처럼 보였다.
쉴 새 없이 돌아가던 자수기계가 천천히 하나씩 잠을 자듯 스르륵 멈추어 갔다.
"사장님 나 이제 퇴근해요"
"그래 지수야 수고했다. 새로 온 아이랑 같이 퇴근해서 저녁 먹으렴"
" 네 사장님. 야 까까머리 나랑 같이 숙소에 가자. 이리 와 "
씩씩하고 거침없어 보이는 단발머리 여자아이에 손에 이끌려 지하철 2호선 신도림역으로
가는 지하철 안으로 끌려가듯 들어갔다.
아침에 느꼈던 불안감이 알 수 없는 포근함과 설렘으로 바뀌고 있을 무렵
지하철 안내 방송이 들렸다.
" 다음 내리실 역은 신도림역 신도림역 내리실 곳은 왼쪽입니다."
낯설고 무서울 것 만 같았던 서울의 첫날밤은 지하철 안내 방송의 분명한 설명처럼
또렷하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