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성 없는 전쟁: AI 패권과 대한민국의 길

21세기 국가의 운명, AI 주권에 달렸다

by 인성미남

20세기 인류가 이념을 두고 총성 없는 냉전을 벌였다면, 21세기는 데이터를 둘러싼 ‘AI 신냉전’의 시대입니다. 미국은 ‘칩스법(CHIPS Act)’¹ 등을 통해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부으며 기술 초격차를 유지하려 하고, 중국은 ‘신세대 인공지능 발전 규획’을 필두로 국가 차원에서 ‘AI 굴기(崛起)’²에 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스탠퍼드 대학의 한 AI 전문가는 “이는 단순한 기술 경쟁을 넘어 21세기 문명의 운영체제(OS)를 누가 장악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단언합니다. 이 거대한 경쟁은 혁신을 넘어, 미래 세계의 표준과 질서를 결정짓는 ‘AI 군비 경쟁’의 양상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데이터, 21세기의 보이지 않는 영토


이 전쟁의 핵심 자원은 석유나 천연가스가 아닌 ‘데이터’입니다. 데이터는 AI를 학습시키는 식량이자, AI의 판단력을 결정하는 두뇌와 같습니다. 그리고 AI는 이미 금융, 안보, 미디어, 문화를 막론하고 사회 모든 시스템의 운영체제(OS)가 되고 있습니다.

결국 특정 국가의 데이터와 AI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은, 그 국가의 언어, 가치관, 상업적 이익이 전 세계에 보이지 않는 표준으로 자리 잡는 ‘데이터 제국주의’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스탠퍼드 인간중심 AI연구소(HAI)의 보고서에 따르면, 주요 거대 언어 모델(LLM) ³ 학습 데이터의 92.6%가 영어라는 사실은, 이 보이지 않는 영토 전쟁이 문화적 차원을 넘어 어떻게 경제적 종속으로 이어지는지를 명백히 보여줍니다.

AI가 추천하는 상품, AI가 예측하는 금융 시장, AI가 제공하는 정보에 전 세계가 종속되는 악순환이 시작된 것입니다.

Whisk_jawn2zkyjq.jpg 데이터 흐름도


기회와 위기의 갈림길에 선 대한민국


그렇다면 이 거대한 패권 경쟁의 한복판에서 대한민국의 좌표는 어디입니까? 우리에게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주도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메모리 반도체 인프라, 초고속 ICT 통신망, 그리고 전 세계를 매료시킨 K-컬처라는 방대하고 정제된 데이터 자산이 있습니다. 이는 분명 우리의 소중한 ‘전략적 자산’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생성형 AI의 핵심인 거대 언어 모델(LLM) 개발에서는 미국과 중국의 거인들을 뒤쫓는 후발주자의 입장이며, 국내 검색엔진 점유율이 위협받고 동영상 플랫폼은 사실상 해외 서비스가 독점하는 현실 속에서 막대한 양의 데이터가 국경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버린 AI(Sovereign AI)'⁴, 즉 우리만의 데이터와 가치관으로 학습시킨 ‘AI 주권’의 확립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적인 국가 생존 전략입니다. 이는 ‘기술적 쇄국주의’가 아니라, 글로벌 AI 생태계에서 대등한 파트너로서 협상하고 우리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최소한의 ‘기술 주권 카드’를 확보하는 일입니다. 네이버, 카카오, KT, LG 등 국내 기업들이 고군분투하며 자체 모델을 개발하고, 정부가 AI 분야 R&D에 수천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세계는 어떻게 'AI 주권'을 외치는가


이러한 고민은 우리만의 것이 아닙니다. 프랑스는 오랜 언어 보호 전통(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연장선상에서, 정부 주도로 프랑스어 데이터를 집중적으로 구축하며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려 합니다. 아랍에미리트(UAE)는 자체 개발한 LLM '팰컨(Falcon)'을 앞세워 중동의 디지털 허브가 되어 석유 이후 시대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AI를 국가 안보 기술의 핵심으로 삼고, 여기서 파생된 기술을 민간에 이전하며 '스타트업 네이션'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모두가 자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AI 주권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AI 주권은 더 이상 IT 부처나 기술 기업만의 과제가 아닙니다. 이는 외교, 안보, 산업, 교육, 문화를 아우르는 대한민국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야 하는 '총력전'에 가깝습니다.

정부와 기업이 전장에서 싸우는 동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개개인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 총성 없는 전쟁의 진정한 승패는 어쩌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식과 실천에 달려있을지 모릅니다.


(2부에서 계속)



용어해설 (Glossary)


¹ 칩스법(CHIPS Act): 미국 반도체과학법(Creating Helpful Incentives to Produce Semiconductors and Science Act). 미국 내 반도체 생산 및 연구를 장려하고, 중국 등 해외 공급망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제정된 법안입니다.


² AI 굴기(崛起): '우뚝 솟아오름'을 뜻하는 중국어. 시진핑 정부가 추진하는 '인공지능 강국' 건설을 목표로 하는 국가 발전 전략을 상징하는 용어입니다.


³ 거대 언어 모델(LLM): Large Language Model. 방대한 양의 텍스트 데이터를 학습하여, 인간과 유사한 언어를 이해하고 생성해 내는 인공지능 모델을 말합니다. 챗GPT와 같은 생성형 AI의 기반이 되는 기술입니다.


소버린 AI(Sovereign AI): 국가나 특정 지역이 자국의 데이터와 가치관을 기반으로 직접 개발하고 통제하는 인공지능 모델. 기술 종속에서 벗어나 'AI 주권'을 확보하려는 국가적 차원의 전략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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