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시선에 살았던 갑옷 같은 시절

by 인성미남


며칠이고 설거지통에 쌓여가는 그릇들을 보며, 텅 빈 식탁을 마주하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이다지도 겁이 나는 걸까. 혼자 밥을 먹는 것이, 혼자 잠드는 것이, 왜 이렇게 무섭고 낯선 일이 되었을까.


답은 의외로 간단한 곳에 있었다. 나는 한 번도 혼자였던 적이 없었던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나' 자신이었던 적이 없었다.


기억나지 않는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갑옷을 입고 살았던 것 같다.


어릴 적에는 '착한 아들'의 갑옷을 입었다. 말썽 한번 피우지 않고, 부모님의 자랑거리가 되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 그것이 내가 입은 첫 번째 갑옷이었다.


회사에 들어가서는 '성실한 회사원 '의 갑옷을 입었다.


누구보다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했다.


주말에도 일이 생기면 달려 나갔고, 아이의 학예회 날짜도 잊은 채 야근을 했다. 몸이 부서져라 일했다. 피곤하다, 힘들다는 말은 나약한 자들의 넋두리라 여겼다.


갑옷 속의 나는 비명을 질렀지만,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나조차도 애써 외면했다.


가정을 꾸리고 나서는 '책임감 있는 가장'이라는, 가장 무겁고 빛나는 갑옷을 입었다. 가족들의 웃음이 나의 훈장이었고, 매달 통장에 찍히는 월급이 나의 존재 이유였다.


그 갑옷들은 꽤나 훌륭했다. 세상의 비바람과 날카로운 시선으로부터 나와 내 가족을 든든하게 지켜주었다.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빛나는 명예도 안겨주었다.


하지만, 갑옷은 너무나 무거웠다.


갑옷은 피부와 엉겨 붙어 한 몸이 되어갔다. 갑옷 속의 나는 늘 땀 흘리고 있었고, 조금씩 숨이 막혀왔다. 맨몸의 내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점점 잊어갔다.


번아웃과 공황장애가 한꺼번에 찾아왔다.

이혼을 하게 되고 아내는 남이 되고 아들은 그렇게 남이 되어 버린 아내를 따라 나의 곁을 떠났다.


갑자기, 모든 갑옷이 동시에 벗겨졌다. 수십 년 만에 드러난 맨몸은 너무나 희고 연약해서, 사소한 바람에도 쓰라렸다.


나는 거울 앞에 다시 섰다.


갑옷에 가려져 있던, 오랫동안 돌보지 못한 나의 맨얼굴.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갑옷을 입는 법은 배웠지만, 벗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맨몸으로 살아가는 법은, 더더욱 알지 못했다.


어쩌면 이것이 진짜 시작인 것도 같다.

누군가가 씌워준 역할이 아닌, 진짜 나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시간.


맨몸은 춥지만,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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