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by 인성미남

갑옷이 사라진 맨몸. 거울 앞에 선 나는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한없이 초라했다.


후회와 자책. 그 두 단어가 번갈아 가며 가슴을 날카롭게 후벼 팠다. 왜 그렇게 살았을까. 왜 단 한 번도 나를 돌아보지 않았을까. 더 똑똑하게, 더 지혜롭게 살 수는 없었을까. 수많은 ‘왜’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떠다녔다.


답 없는 질문들에 지쳐갈 무렵,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안방 서랍을 열었다. 아내가 떠나며 미처 다 정리하지 못한, 우리의 오래된 시간들이 먼지 쌓인 채 잠들어 있는 곳. 그 구석에서 낡은 나무 상자 하나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빛바랜 사진들이 뒤엉켜 있었다.


한 장, 한 장. 무심하게 사진을 넘기던 내 손가락이 어느 한 지점에서 우뚝 멈췄다.


스무 살 무렵의 나. 대학교 교정,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서 기타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청년. 세상 무서운 줄 모르던, 세상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의 눈은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갑옷을 입기 전의 나. 나는 한참 동안 그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의 그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아저씨, 꿈을 이뤘어요?’ ‘행복하게 살고 있나요?’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차마 그 맑은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목울대가 뜨거워지며 무언가 단단한 것이 울컥, 하고 치밀어 올랐다.


나는 사진을 내려놓고, 다시 거울 앞에 섰다. 사진 속의 그와, 거울 속의 내가 겹쳐 보였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 끝에, 그들에게 첫마디를 건넸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너의 손에 있던 열정을 빼앗고 무거운 현실을 쥐여줘서, 미안하다.


세상이 정해놓은 길만이 정답이라 믿고 너의 목소리를 억눌러서, 미안하다.


힘들다고, 아프다고, 쉬고 싶다고 속으로 수없이 외쳤을 텐데 성공을 위한 통증이라며 모른 척해서, 정말 미안하다.


단 한 번도, 단 한순간도, 온전히 너의 편이 되어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툭. 결국 참았던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 번 터진 눈물은 댐이 무너지듯 쏟아져 내렸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었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모를 눈물이었다.


지난 세월에 대한 회한인지, 남아있는 날들에 대한 두려움인지, 혹은, 바보같이 살아온 나 자신에 대한 연민인지. 한참을, 아주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눈물이 그치고, 조금은 퉁퉁 부은 눈으로 다시 거울을 보았다. 여전히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돌덩이 하나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스스로를 원망하는 대신, 처음으로 나를 가엾이 여겼다. 참 애썼구나. 그 무거운 갑옷들을 입고 버티느라, 정말 고생 많았구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며칠째 식탁 위에 방치되어 있던 차갑게 식은 밥그릇을 들었다. 그리고 설거지통에 담갔다.


따뜻한 물을 틀자, 굳어 있던 밥풀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꼭, 내 얼어붙었던 마음처럼.




초련(初戀)


녹슨 수도꼭지 마냥 찔끔 뚝뚝

마음이 떨어져 뒹군다.

뚝 뚝 뚝

잠글 수도 없는 녹슨 마음 한구석

귀퉁이 에 인생의 반이 맺혀있고

남은 반 생(生)의 삶이 쏟아질라

애달프고 초련(初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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