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롤스로이스를 타는 테니스코트 위의 록스타

1970~80년대를 풍미한 리투아니아 사자 비타스 게룰라이티스

by 원리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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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 코트 위의 록스타테니스 코트 위의 록스타

롤스로이스를 타는 플레이보이 비타스 게룰라이티스


1939년 러시아의 리투아니아 침공으로 인해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한

리투아니아 출신의 부모에게 태어난 비타스 게룰라이티스

뉴욕에 정착한 그의 부모님은 두 자녀를 모두 테니스 선수로 키워냈고,

그중 비타스는 당대 최고의 테니스 스타로 명성을 날렸어.


비타스는 큰 키에 수려한 외모로 큰 인기를 끌었는데 뛰어난 테니스 재능뿐만 아니라

강렬한 승부욕을 보여주며 리투아니아의 사자라는 별명을 얻게 돼.

그는 훌륭한 선수들이 즐비했던 1970년대에 투어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고,

1번의 그랜드슬램 우승을 포함해 ATP 투어에서 통산 26번의 우승컵을 들어 올렸어.

비록 당대 최고의 선수였던 비외른 보리, 지미 코너스, 존 매캔로에게 여러 차례 좌절을 맛보며

일인자가 되진 못했지만 1970년을 대표하는 선수 중 한 명으로 기억되는 비타스 게룰라이티스


그의 또 다른 별명은 브로드웨이 비타스였어.

20대 초반부터 비타스는 본인의 머리색과 비슷한 노란색 롤스로이스 컨버터블을 몰았는데,

번호판에는 그를 상징하는 비타스 G가 적혀있었고 매일 밤 차를 몰고 뉴욕에서 광란의 파티를 즐겼어.

비타스는 뉴욕의 전설적인 스튜디오인 스튜디오 54에서 앤디 워홀, 믹 재거 등과 어울렸고,

테니스를 넘어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자리 잡게 돼.


비외른 보리, 존 매캔로 같은 전설적인 테니스 선수들은 그를 락스타라고 불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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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윔블던 준결승


지금도 역대 최고의 경기 중 하나로 손꼽히는 1977년 윔블던 준결승

비타스 게룰라이티스는 디펜딩 챔피언 비외른 보리를 상대로 5세트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을 펼쳤어.


경기는 보리가 6-4, 3-6, 6-3, 3-6, 8-6으로 승리하며 결승에 진출했지만,

디펜딩 챔피언을 벼랑 끝까지 몰아붙인 비타스의 맹렬한 기세는 윔블던 역사에 남을 명경기를 만들었고

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어.


비타스는 점프를 거의 하지 않고 간결한 서브를 넣은 후 곧장 전위에 나가

발리로 포인트를 따내는 전술을 사용했고 비외른 보리는 강력한 탑스핀 스트로크와 로브를

적절히 섞어가며 공격적인 성향의 비타스를 공략했어.


5세트에서 결국 보리는 비타스의 서브게임을 브레이크 하며 긴 승부에 마침표를 찍었고,

다소 상반되는 이미지의 두 선수는 친구가 되며 깊은 우정을 나누게 돼.


경기 후 인터뷰에서 기자가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을 묻자

비타스는 제 기억에 영국 관중들이 차를 마시러 나가지 않았던 건 그때가 유일했다며 위트 있는 대답을 남겨


“It’s the only time I can remember that the English spectators didn’t leave for t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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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 호주오픈 우승

당시 호주오픈은 12월에 열렸는데 크리스마스 기간과 겹쳤고, 긴 비행시간으로 인해

세계적인 선수들이 불참하는 경우가 꽤 있었어.

비외른 보리도 선수생활 동안 호주오픈에 단 한차례밖에 참가하지 않았지.


1977년 호주오픈에서 비타스 게룰라이티스는 세계랭킹 5위였지만 1번 시드를 받았고,

디펜딩 챔피언이자 2번 시드 로스코 태너는 이변의 희생양으로 초반 라운드에서 탈락하게 돼.

1977년 시즌을 성공적으로 보낸 비타스는 호주에서 첫 그랜드슬램 우승을 노렸고

마침내 결승에 올라 대회기간 연습 파트너였던 영국의 존로이드를 상대하게 돼.


세계랭킹 40위였던 존 로이드는 시드를 받지 못했지만 그랜드슬램 챔피언

존 뉴컴을 꺾었고 결승에서도 0:2로 뒤진 상태에서 2:2 동점을 만들며 비타스를 궁지에 몰아.

경기 초반부터 네트 대시를 하느라 지친 다리에 경련까지 일어나며 큰 위기를 겪은 비타스였지만

결국 마지막 세트를 6:2로 이기면서 그 해 호주오픈의 승자로 역사에 이름을 새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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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one beats Vitas Gerulaitis 17 times in a row”


세계랭킹 3위까지 올랐던 비타스 게룰라이티스는 시대를 잘못 태어난 덕분에

커리어 내내 당대 최고의 선수였던 비외른 보리, 지미 코너스, 잭 맥캔로를 계속해서 상대해야 했고

상대전적에서 압도적으로 밀리며, 통산 그랜드슬램 우승 횟수가 단 한차례에 그쳐야만 했어.


특히 그는 짐보라 불리는 전 세계랭킹 1위 지미 코너스에게 16연패를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는데

1980년에 열린 왕중왕전인 마스터즈 컵 준결승에서 마침내 승리하며 귀중한 1승을 거둬.


경기 후 인터뷰에서 비타스는 역사에 남을 명언을 남기게 돼.


이것이 여러분 모두에게 교훈이 되기를 바랍니다.


비타스 게룰라이티스를 17번 연속으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스터즈 컵 결승에 오른 비타스는 단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비외른 보리에게 또다시 패배하며

우승에 실패하게 돼. 비외른 보리는 은퇴 전까지 비타스에게 17연승을 거두며

그를 17번 연속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테니스 선수로 남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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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펜던트 지에 따르면 "테니스를 도시에서 가장 멋진 스포츠로 만드는 데 비타스만큼 기여한 사람은 없었다. 최고의 테니스 플레이보이였던 '브로드웨이 비타스'는 여배우와 모델들과 데이트를 하고, 록 밴드에서 연주하고, 새벽까지 파티를 즐겼다."



브로드웨이 비타스는 15년 동안의 프로 테니스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1986년에 은퇴했어.


그 후 텔레비전 해설자, 피트 샘프라스의 코치, 베테랑 경기 투어 등을 뛰다가

1994년 친구집에서 잠을 자던 중 불의의 사고로 일산화탄소에 중독되며 40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돼.


기록만 보면 당대 위대한 선수의 반열에는 들 수 없지만 비타스 게룰라이티스는

당대를 대표하는 뉴욕 최고의 셀레브리티로 테니스를 도시에서 가장 멋진 스포츠로 만든 사람임은 틀림없어.




한 선수에게만 16번을 패배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마침내 승리를 기록한 비타스 게룰라이티스처럼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길 바래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