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이키와 계약한 최초의 프로 스포츠선수

1973년 ATP 최초로 세계랭킹 1위에 오른 일리 나스타세

by 원리툰


부쿠레슈티 광대 일리 나스타세 (Ille Nastase)

현재 사용하는 ATP 랭킹 시스템이 창설된 1973년 전 세계 최초로 1위에 오른 선수는

빼어난 실력만큼이나 예측 불가능한 행동들로 인해 부쿠레슈티의 광대로 불렸던 일리 나스타세야.


일리 나스타세는 1946년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출생했어.

나스타세는 같은 루마니아 출신의 이온 티리악과 함께 아마추어 투어로 선수생활을 시작했어.

티리악과 나스타세는 복식 파트너로 많은 경기를 뛰며 좋은 성적을 거뒀는데 특히

1970년 롤랑가로스에서는 아서 애쉬, 찰리 파사렐 조에게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해.


1970년대부터 단식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나스타세는 1972년 윔블던 결승에 올라갔는데,

앤디 머레이의 우승 이전 오랜 기간 동안 마지막 영국인 윔블던 우승 기록을 갖고 있던

스탠 스미스에게 3:2로 아쉽게 패배했어.


나스타세는 이미 당대 최고의 선수들을 꺾고 그랜드슬램 결승에도 오를 만큼 출중한

실력을 갖췄지만 그의 제 멋대로인 태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어.


하지만 같은 해 포레스트힐스에서 열린 US 오픈 결승전 (당시에는 잔디코트)에서 미국의 아서 애쉬를 상대로

5세트까지 가는 접전 끝에 승리하며 첫 그랜드슬램 우승컵을 들어 올리게 돼.



아서 애쉬(좌)와 일리 나스타세(우)

1973년 ATP 역사상 최초로 세계랭킹 1위에 오른 나스타세


커리어 정점을 찍었던 1973년 나스타세는 롤랑가로스에서 마침내 두 번째 그랜드슬램 우승을 차지해

결승전까지 단 한 세트도 내주지 않으면서 대회 내내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준 나스타세는

우승컵을 놓고 유고의 니콜라 필리치를 상대했는데 6-3, 6-3, 6-0으로 승리하며

무실세트 우승이라는 엄청난 업적을 달성해


1973년 윔블던을 앞두고 니콜라 필리치가 대회 주최 측으로부터 출전 제외를 당하자

80여 명의 선수들이 집단으로 항의하며 윔블던을 보이콧하게 돼.


이때까지도 통합 랭킹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아 토너먼트마다 자체 시드를 배정하고

자체 규정을 적용하는 불합리함이 있었는데 1972년 최초의 프로 테니스 연맹인 ATP가 창설되며,

곧바로 랭킹시스템 구축에 착수했어. 그전까진 랭킹과 상관없이 티켓 파워가 강한

선수들이 우선순위를 받는 경우가 많아서 선수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어.

마침내 1973년 8월 23일 최초의 ATP 국제선수 랭킹이 발표되었는데

루마니아의 일리 나스타세가 역사상 최초의 세계랭킹 1위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어.


아이러니하게도 나스타세는 ATP가 주도한 랭킹 시스템을 강력하게 지지하진 않았지만

통합랭킹시스템으로 인해 자격 있는 선수들의 토너먼트 참여가 가능해졌어.

나스타세는 1974년 6월까지 랭킹 1위를 유지하다 존 뉴컴에게 선두자리를 넘겨주게 돼.


나이키와 계약한 최초의 프로 스포츠 선수

나스타세가 공식적인 세계랭킹 1위에 오르기 전 1972년

나이키는 루마니아 출신으로 이미 전 세계적 명성을 갖고 있던 나스타세에 관심을 갖게 돼.


나스타세는 기존에 없던 퍼포먼스와 화려한 쇼맨쉽, 상대를 자극하는 언행과 심판에 대한 무례한 행동 등으로 로드 레이버, 캔 로즈웰, 존 뉴컴 등 겸손했던 호주의 스타플레이어들의 경기에 익숙했던 테니스 팬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며 단숨에 스포츠 계의 슈퍼스타로 떠올랐어.


나스타세는 경기 내내 예측불허의 샷메이킹과 쇼맨십을 보여줬고 상대의 로브 공격에

대항해 날리는 부쿠레슈티 백파이어는 수많은 팬들을 테니스 대회로 이끌었어.

이러한 영향력으로 인해 나이키는 그에게 최초의 프로 스포츠 선수와의 계약을 제안했고

나스타세 이후 스포츠 스타 마케팅은 나이키의 대표적인 전략으로 자리 잡아.


하지만 일리 나스타세와 나이키의 계약은 오래가진 못했고 이듬해 나스타세는 아디다스 신발을 신고 등장해



논란의 스파게티 라켓으로 기예르모 빌라스의 연승 저지

1977년 엑상프로방스에서 맞붙은 나스타세와 빌라스

빌라스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테니스선수로 당시 클레이코트에서 엄청난 지배력을 보여주며

나스타세와 경기 전까지 무려 53연승을 달리고 있었어.


당시 ATP에서는 새로운 도구인 스파게티 라켓이 논란의 중심에 있었는데,

스트링을 두 겹으로 겹쳐놓고 시험용 낚싯줄을 세로 여섯 줄, 가로 여섯 줄을 감은 후

줄이 교차되는 부분을 접착테이프와 마카로니같이 생긴 플라스틱 튜브로 보호했어

이 웃기게 생긴 더블 스트링 라켓은 미친듯한 스핀을 발생시켰기 때문에

상대는 제대로 된 플레이를 하지 못한 채 경기를 망치게 됐어.


나스타세 또한 이 변종 라켓의 희생자였는데 빌라스와의 경기 전에

만난 스파게티 라켓을 쓰는 조르주 고벤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경험해

이 경기 후 나스타세는 스파게티 라켓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난했지만

결국 빌라스와의 결승전에서 마법의 도구를 사용하게 돼.

ITF에 의해 공식적으로 스파게티 라켓 사용이 금지되기 전에 사용했기 때문에

빌라스는 항의할 수 없었고, 파죽의 53연승을 어이없게 마감하게 돼.

스파게티 라켓

Nasty VS Super Brat 악동들의 데스 매치

1979년 US오픈 2라운드에서 맞붙은 부쿠레슈티의 광대 나스타세와 떠오르는 악동 존 매캔로의 경기

세계랭킹 3위로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20세의 존 매캔로를 만나게 된 33세의 일리 나스타세는

경기를 지저분한 진흙탕 싸움으로 끌고 갈 생각이었고, 경기 내내 라인 콜에 항의하며

심판과 끊임없이 언쟁했어. 심지어 경기장 위를 지나가는 비행기 소리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고

심판인 마이크 해먼드는 공항 관제탑에 전화해서 비행기 이륙을 중지해 달라고 요청해야 했어.

결국 참지 못한 매캔로가 욕설을 날렸고, 경기는 점점 더 과열되기 시작했어.


세트스코어 1:2로 지고 있던 나스타세는 4세트에서 본격적으로 시간을 지연하기 시작했고

수차례 경고를 했던 심판은 나스타세에게 게임 페널티를 부여하며 경기는 3:1로 벌어지게 돼

나스타세는 판정에 불만을 보이며 경기를 보이콧했고 결국 해먼드는 몰수패를 선언했어.

이미 흥분한 관중들은 끊임없는 야유를 보냈고 심지어 팬들끼리 싸움도 붙었어

그야말로 아수라판이었지.


결국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토너먼트 디렉터가 개입했고, 심판을 교체하게 돼.

힘겹게 재개된 경기에서 존 매캔로는 강력한 서브를 무기로 경기를 6:2로 끝냈어.

경기 후 매캔로는 나스타세의 얼굴에 펀치를 날리고 싶었다고 회상했지만

함께 저녁을 먹자는 나스타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펍에서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냈다고 해


나스타세의 기행은 ITF가 선수들의 행동강령을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어.

수많은 기행과 논란거리에도 불구하고 나스타세는 1970년대를 대표하는 선수였고

테니스를 스포츠를 넘어 엔터테인먼트 게임으로 격상시켜 준 주역 중 한 명이야.


일리 나스타세의 어록 중 하나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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