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출신 최초의 그랜드슬램 우승자이자 클레이코트 53연승 원조 흙신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예전 개그콘서트에서 개그맨 박성광이 술에 취한 연기를 하며 외친 유행어를 기억해?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15년이 지난 지금도 심심찮게 회자되는 유행어라는 게 참 씁쓸하지.
특히 냉혹한 승부의 세계인 스포츠에서는 패자를 위한 기억 따윈 사치에 불과해.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선수가 환희의 기쁨대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 기억이 있을 거야.
승자와 패자 그 희비가 교차하는 건 찰나지만 기록은 영원히 기억돼.
테니스에서도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가 지배한 Big3 시대는 기억되지만
그들에게 밀려 그랜드슬램 우승 없이 커리어를 마감한 수많은 선수들은 기억되지 않아.
Big3 시대 인간계 수문장이라고 불렸던 토마스 베르디히, 조 윌프리드 송가, 다비드 페러가
그랜드슬램 무대에서 보여줬던 퍼포먼스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야.
테니스가 본격적인 프로 스포츠로 자리 잡은 1970년대에는 수많은 스타가 즐비했는데
본격적인 랭킹 시스템이 도입된 1973년 루마니아의 일리 나스타세가
첫 세계 랭킹 1위에 오른 이후 스웨덴 출신의 아이스맨 비외른 보리와
투쟁심 넘치는 미국의 지미 코너스가 세계랭킹 1위를 양분했어.
같은 시기 팜파스의 황소로 불린 아르헨티나 출신의 왼손잡이 기예르모 빌라스는
헤비 탑스핀과 강철 체력을 바탕으로 세계랭킹 1위 자리를 강력하게 위협했어.
그는 특히 클레이코트에서 강점을 보였는데, 1975년 롤랑가로스 결승전에서
역시 헤비탑스핀이 강점인 비외른 보리와 베이스라인 랠리 대결을 펼친 끝에 패배해.
빌라스는 1974년 21살의 나이로 탑 10에 성공적으로 진입했고, 테니스뿐만 아니라
시인으로 등단까지 할 정도로 다양한 재능을 뽐냈지만, 그랜드슬램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한 끗 차이로 승리를 놓치며 만년 이인자라는 평가를 받아야만 했어.
1975년 US오픈 준결승에서는 마누엘 오란테스를 상대로 3세트 5:0 매치포인트 상황에서
마무리를 못하고 결국 역전패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해.
New Chapter : 이온 티리악과의 만남
메이저 우승을 위해 절치부심한 기예르모 빌라스는 선수생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선택을 하게 돼.
바로 루마니아 출신의 이온 티리악을 코치로 고용한 거야.
1970년 일리 나스타세와 함께 롤랑가로스 남자 복식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던 그는 빌라스의
코치 제안을 받아들이며, 본격적으로 섬세한 성격의 빌라스를 훈련을 통해 강하게 조련시켜.
티리악은 빌라스의 서브 포지션을 바꾸도록 조언했고, 매일 6시간이 넘는 강훈련을 통해
실전에서 먹힐 수 있는 백핸드 슬라이스 기술을 향상했어.
매니저이자 코치인 이온 티리악 과의 만남 이후 빌라스는 오직 승리를 위해서 사는 사람처럼
마인드셋을 바꿨고 ATP 역사 상 가장 압도적인 시즌으로 불리는 1977년을 보내게 돼
1977년 라틴아메리카 최초의 그랜드슬램 우승자
1970년대 당대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던 비외른 보리와 비교되는 윤기 넘치는 갈색머리, 헤어밴드,
몸에 딱 붙은 유니폼, 엄청난 헤비 탑스핀을 가졌던 선수.
테니스 선수이자 시인이기도 했던 아르헨티나의 기예르모 빌라스
만년 이인자로 불렸던 그는 1977년 최고의 시즌을 보내며 마침내 일인자에 오를 기회를 잡게 돼.
첫 그랜드슬램 대회인 호주오픈에서 결승에 오른 빌라스는 로켓이라는 별명을 가진 미국의 강서버
로스코 태너를 만나 3:0으로 패했지만 잔디코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며 시즌을 산뜻하게 출발해
1977년 호주오픈은 멜버른 외곽의 잔디코트인 쿠용 스타디움에서 개최됐어.
지금은 4대 그랜드슬램 대회로 잘 자리 잡았지만 당시에는 낮은 상금과 긴 비행시간으로 인해
정상급 선수들이 불참했기 때문에 빌라스의 결승 진출이 크게 주목받진 못했어.
1977년 프랑스오픈을 앞두고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비외른 보리가 같은 기간 미국에서 열리는
WTT(월드팀테니스) 참가를 선언하며 대회에 불참하게 돼.
비외른 보리 외에는 클레이코트에서 경쟁자가 없었던 기예르모 빌라스에게는 희소식이었지.
마침내 그는 롤랑가로스 결승에서 브라이언 고트프리드에게
더블베이글을 선사하며 3:0으로 완벽한 승리를 거둬.
1977년 한 해 동안 기예르모 빌라스는 롤랑가로스 우승을 포함해 16개의 ATP 투어 타이틀을 따냈고
클레이코트에서 무려 53연승을 이어가게 돼.
빌라스의 기록은 2006년 흙신으로 불리는 라파엘 나달에 의해 약 30년 만에 깨졌는데
나달은 클레이코트 81연승이라는 미친듯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어.
빌라스는 포레스트 힐스에서 마지막으로 열리는 US오픈에 4번 시드로 참가했어.
당시 US오픈은 1975년부터 잔디코트를 대신해 클레이코트에서 진행됐는데, 클레이 코트의
최강자였던 기예르모 빌라스와, 디펜딩 챔피언 지미 코너스가 결승에서 만났어
1977년의 US오픈 전 뉴욕에서는 대규모의 정전 사태가 발생했고 도시는 약탈과 폭력으로 황폐화 됐어.
심지어 US오픈 대회 중 관중석에서 총격 사건이 일어났고 대회 기간 내내 어수선한 상황으로 인해
결승전 분위기는 마치 화약고와 같았어.
1세트를 지미 코너스에게 뺏겼지만, 클레이코트에서 연승을 달리던 빌라스는
전략을 수정해 2세트를 연속으로 가져갔고 마지막 4세트는 베이글스코어로 경기를 마무리해
경기가 끝나자 관중들은 선수를 향해 뛰쳐나왔고, 승리한 빌라스를 들고 환호해
1977년 빌라스는 2번의 그랜드슬램 우승과 함께 오픈 시대 최고 기록인 시즌 46연승을 기록했고
145승 14패라는 미친 기록을 달성해. 그야말로 폭주기관차 같은 시즌이었지.
그랜드슬램 우승 후 빌라스의 인터뷰
Once you win a big title, you want to win another one. If you win two, you want a third, and then you want them to build a statue of you in the middle of Buenos Aires.”
"큰 타이틀을 따면 또 다른 타이틀을 따고 싶어 지죠. 두 번 우승하면 세 번째 타이틀을 따고,
부에노스아이레스 한복판에 동상을 세워달라고 하죠."
“I didn’t lose against a player,” Vilas said. “I lost against a racquet.”
빌라스의 연승기록을 막은 악마의 도구 스파게티 라켓
폭주기관차처럼 멈출 줄 모르던 빌라스의 질주는 엑상프로방스 대회에서 의외의 사건으로 마무리 돼.
당시 라켓 사용 규정의 허점을 이용해 무명에 가까운 선수였던 마이크 피시바흐가 사용한
스파게티 라켓이 투어에서 큰 논란이 되었는데, 더블스트링을 활용해 말도 안 되는 탑스핀을 만들어냈어.
대회 결승전에서 만난 일리 나스타세 또한 스파게티 라켓의 희생양이었지만, 생각을 바꾼 그는
규정의 허술함을 활용해 사용 금지 적용 전 빌라스를 상대로 스파게티 라켓을 사용했어.
빌라스는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결국 기권을 하게 돼.
나스타세에게 당한 패배를 제외하면 빌라스의 연승기록은 무려 74연승이야
마라톤 같은 시즌을 보낸 빌라스지만 그는 결국 세계랭킹 1위에는 오르지 못했어.
2번의 그랜드슬램 우승포함 17번의 우승 그리고 압도적인 최다승에도 불구하고
당시 ATP 랭킹 산정 시스템은 선수들의 모든 성적의 평균을 반영해 랭킹을 정했고,
누구보다 많은 대회에 출전했던 빌라스에게는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했어.
빌라스는 1977년 압도적인 시즌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와 다른 랭킹 산정 시스템으로
인해 세계랭킹 1위에 오르지 못한 비공식 세계 최고의 선수로 남게 돼.
훗날 아르헨티나의 푸코에 의해 빌라스의 성적을 분석한 결과 1975~1976년까지
약 7주 동안 1위를 차지했을 거라 밝혔지만 당시에는 랭킹 발표를 주단위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빌라스의 세계랭킹 1위는 ATP에 의해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어.
(1975년에는 단 13번만 랭킹 발표를 했다)
비록 세계랭킹 1위에 오르진 못했지만, 본인의 한계를 뛰어넘어
역사상 최고의 단일 시즌을 보낸 기예르모 빌라스에게 더 이상 이인자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아
스토리 있는 2등도 기억하는 아름다운 세상이 되길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기예르모 빌라스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