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코트 위 복수혈전,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다

1975년 윔블던에서 우승한 최초의 흑인 아서 애쉬

by 원리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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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hurAshe


그랜드슬램에서 우승한 최초의 흑인 남성 아서 애쉬


1968년 프로 선수도 메이저대회에 출전이 허용되면서 비로소 프로와 아마추어가

한 대회에서 모두 경쟁할 수 있는 오픈에라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어.


1943년 인종분리법이 존재하던 미국 버지니아에서 태어난 아서 애쉬는 아프리카계 흑인으로

쉽지 않은 삶을 살았어. 어린 애쉬는 테니스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며, 인종차별이 만연했던

당시 지역사회의 주목을 받았고 그랜드슬램에서 우승한 최초의 흑인 여성이었던 알시아 깁슨의

코치였던 로버트 월터 존슨 박사를 만나며 아마추어 테니스 선수로 커리어를 쌓게 돼.


1968년 포레스트힐스 잔디코트에서 열린 US오픈 결승에서 톰 오커를 상대로 승리하며

그랜드슬램에서 우승한 최초의 흑인 남자선수로 이름을 남긴 아서 애쉬


하지만 그랜드슬램 우승자임에도 아마추어 신분이었던 애쉬는 상금을 포기해야 했고,

생활비로 하루 20달러 총 280달러만 챙길 수 있었어.


애쉬의 우승 상금은 준우승자였던 톰 오커가 대신 받게돼.


Start where you are. Use what you have. Do what you 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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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에 대항한 아서 애쉬

1970년대까지도 백인의 전유물이었던 테니스에서 아서 애쉬는 수많은 차별을 이겨냈어

1968년 처음으로 그랜드슬램 우승까지 차지했지만 세상은 여전히

그의 피부색이 까맣다는 이유로 차별적인 태도를 유지했지.

아마추어 선수에 대한 대우가 지금과는 다르게 형편없었고, 선수들은 대회뿐만 아니라

심판들의 눈치도 살펴야했어.


아서 애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리는 주요 대회에 참여하려고 했는데

남아공 정부의 강력한 인종분리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로 인해

비자 발급을 거듭 거부당하게 돼. 애쉬는 분노했고 인종차별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을 이어나갔지만 한동안 요하네스버그 대회에 참가가 불가능했어.


1973년에야 남아공 정부는 정치적인 이유로 애쉬의 입국을 허용했고, 애쉬는 흑인에게도

경기장 입장을 허용한다는 조건하에서만 대회에 출전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하지만 애쉬의 결정은 반 아파르트헤이트 활동가들과 남아공 흑인사회에서 큰 반발을 샀고

남아공에서 직접 인종차별의 차가운 현실을 마주한 뒤에야 그는 남아공을 국제사회에서 고립되는 게 우선이라 생각해.

애쉬는 테니스 선수 은퇴 후에도 적극적으로 남아공에 대한 국제스포츠 보이콧을 강력하게

외쳤고 1985년에는 남아공 대사관 앞에서 시위 중 체포까지 당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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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살 아서 애쉬 VS 22살 지미 코너스

1975년 윔블던 결승전


미국 출신의 22살 혈기왕성한 지미 코너스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무적의 챔피언이었어.

그는 전년도 윔블던 우승자였고 1974년 모든 대회를 통틀어 99승 4패라는 믿을 수 없는 전적을 기록했지.

1972년 윔블던에서 우승했던 스탠 스미스조차 지미 코너스가 너무 강력한 나머지

누구도 그를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얘기할 정도로 압도적인 기량을 자랑했어.

지미 코너스는 준결승에서 강력한 서브를 가진 로스코 태너를 상대로 3:0 완승을 거두며

쉽사리 결승에 올랐고 모두가 디펜딩 챔피언의 우승을 예상했어.


반면 전성기가 지났다는 평가를 받는 32살의 아서 애쉬는

준결승에서 토니 로슈와 5세트까지 가는 혈전을 펼친 끝에 승리했지만

피투성이가 된 상태로 결승에 올라가야 했어.

이전까지 지미 코너스를 상대로 한 번도 이기지 못한 아서 애쉬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이길 수 있다는 믿음과 함께 엄청난 기적이 필요했어.


경기 후 아서 애쉬는 TV중계를 보며 자신과 비슷한 성향의 로스코 태너의 플레이가

코너스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는 모습을 지켜보며 많은 고민에 빠졌어.

과연 아서 애쉬는 당시 거만한 태도로 인해 공공의 적이었던 지미 코너스를 때려눕힐 수 있을까?


1947년 잭 크라이머와 톰 브라운의 대결 이후 처음으로 미국인들끼리 맞붙게 된 윔블던 결승전에서

많은 관중들은 아서 애쉬를 응원했지만, 노쇠한 애쉬가 승리할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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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선수의 악연

1973년 아서 애쉬는 선수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ATP(프로테니스협회)에서

유고연방의 니콜라 필리치에 대한 출전 금지에 대항해 윔블던 대회 보이콧을 주도하게 돼.


당시에는 선수보다 대회 주최측이 더 큰 힘을 가졌고, 선수들은 랭킹과 상관없이

토너먼트의 입맛에 따라 대회 출전이 허용됐어.

힘의 균형에서 압도적으로 밀리던 선수들은 오픈시대가 개막한 후 다양한 필요성에 의해

1973년 잭 크라이머의 주도로 선수협인 ATP를 출범시켰지만 별다른 변화를 일어나지 않았어.


1973년 국제테니스연맹이 데이비스컵에 불참한 니콜라 필리치에 대해 출전 금지 처분을 내리자

아서 애쉬를 포함 ATP 소속이었던 81명의 선수들이 세계 최고의 대회인 윔블던을 보이콧하게 돼.

그동안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며 끌려다니던 선수들이 ATP 안에 모여 처음으로 한 목소리를 냈고

이번 보이콧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처우 개선에 대한 선수들의 목소리가 커지게 돼.


하지만 모두가 ATP의 움직임에 동참한건 아니였어.

대표적으로 미국의 악동 지미 코너스는 지나치게 개인적인 선수 중 한명이었지.

당시 20살의 지미 코너스는 보이콧에 참여하는 대신에 세계적인 선수들이 불참한 윔블던 대회에

출전하는걸 선호했고, 생애 처음으로 그랜드슬램 8강에 진출했어.(빈집털이에 성공)


ATP의 주축이었던 아서 애쉬에겐 안 그래도 눈에 가시 같았던 지미 코너스였는데,

국가대항전인 데이비스컵마저 개인적인 이유로 불참을 선언하자 애쉬는 분노를 참지 못했어.

그는 지미 코너스의 비애국적인 행동을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윔블던에 열리기 2달 전

코너스와 그의 매니저 빌 리오던은 애쉬를 상대로 500만불짜리 고소를 진행해.


앙금이 쌓일 대로 쌓인 두 선수는 운명의 장난처럼 1975년 윔블던 결승에서 마주하게 돼.

윔블던 결승 전까지 아서 애쉬는 지미 코너스를 상대로 단 한경기도 이기지 못했고

세계랭킹 1위 코너스는 결승 전까지 완벽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우승후보 1순위로 꼽혔어.

애쉬의 친구들조차 그가 망신을 당하는 게 보기 두려운 나머지 경기장에 가지 않을 정도였어.


22살의 챔피언과 32살의 은퇴를 앞둔 백전노장의 대결

과연 애쉬가 코너스의 질주를 막을 수 있을까?


애쉬는 역사와 전통의 윔블던 센터코트에 USA가 쓰여있는 미국팀의 데이비스컵 재킷을 입고

당당히 등장했어. 상대인 코너스의 데이비스컵 보이콧을 간접적으로 자극하면서

승리에 대한 집착과 의지를 보여준 아서 애쉬


승리를 위해선 무엇보다 전과 다른 전략이 필요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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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다

아서 애쉬는 지미 코너스를 이기기 위해 또 다른 흑인 영웅이었던 무하마드 알리를 떠올렸어.

1974년 아프리카 자이르에서 32살의 알리는 24살의 젊은 챔피언 조지 포먼을 상대로

그 유명한 로프 어 도프(Rope-a-dope) 전략을 가져갔어.

알리는 강력한 펀치력을 가진 포먼의 공격에 대항하는 대신 로프에 기대어 방어하면서

때를 기다렸고, 마침내 무수한 공격 끝에 체력이 떨어진 챔피언을 향해 강한 펀치를 날렸고,

8회 TKO로 무패의 챔피언을 그대로 바닥에 침몰시켜.


복싱 역사상 최고의 승부라 손꼽히는 결과를 만들어내며

은퇴를 앞둔 복서에서 다시 한번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복서가 된 무하마드 알리


애쉬는 무하마드 알리에게 영감을 받아 조지 포먼처럼 젊고 강력한 지미 코너스를 이길 전략을 짰어.


빠른 공에 강한 카운터펀쳐였던 지미 코너스를 상대로 강한 공을 치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어.

애쉬는 본인의 스타일을 버리고 승리를 위해 경기 템포를 죽이는 모험을 감행해.

강한 스트로크 대신 칩샷을 날렸고, 코너스를 좌우로 굴리며 반격의 여지를 주지 않았어.


슬라이스 샷과 로브를 적절히 구사하며 경기를 주도하며 20분 만에 1세트를 따낸 애쉬는

2세트 또한 동일한 전략으로 코너스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며 쉽게 가져왔고 우승까진 단 1세트만 남기게 돼

코너스는 애쉬의 새로운 전략에 말린 채 1,2세트를 내줬지만 3세트에서는 죽을 힘으로 달렸고

챔피언 답게 투지 넘치는 역전극을 보여주며 기사회생했지만 이미 아서 애쉬의 영리한

경기 운영에 말리며 힘든 경기를 해야했어.

4세트 마지막 매치포인트 상황에서 애쉬는 코너스의 백핸드 쪽으로 서브를 넣어고

짧게 떨어지는 공을 발리로 끝내며 2시간 7분의 승부를 마무리하게 돼.


흑인 선수 최초의 윔블던 남자 단식 우승이라는 역사를 쓴 아서 애쉬


그는 윔블던에서 우승한 최초이자 마지막 흑인 남자선수로 이름을 남겼고,

전 세계 수많은 테니스 팬들에게 감동을 선사했어.


윔블던 결승 직후 코너스는 애쉬에 대한 소송을 취하했어.

그는 이후 인터뷰를 통해 윔블던 1라운드에서 다리 부상을 당했다고 밝혔지만

그의 부상에도 1975년의 윔블던 결승전이 아서 애쉬의 위대한 승리란건 변함이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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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변화시킨 아서 애쉬

아서 애쉬는 1979년 첫 번째 심장 수술을 받으며 은퇴를 선언했는데

두 번째 수술 후 회복 과정에서 수혈을 받다가 HIV라 불리는 에이즈에 감염된 걸로 알려져.

그는 오랜 기간 병을 숨겼지만 1992년 자신이 에이즈에 감염된 걸 공개적으로 밝혔고 이듬해 49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돼.

그는 사망 전까지도 인권운동 및 자선활동을 이어갔고 에이즈 퇴치를 위한 아서 애쉬 재단을 설립했어.


아서 애쉬는 훌륭한 테니스 선수로 기억되기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이바지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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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 오픈 센터코트의 이름이 되다


인종차별에 당당히 맞서 싸우며 최고의 자리에 오른 아서 애쉬

그는 은퇴 후에도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부시 정부의 아이티 난민 정책에 대항해

목소리는 내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미국 전역에 유소년 테니스 팀을 만들기도 했어.

테니스 선수였을 때보다 은퇴 후에 사회에 더 많은 기여를 했던 아서 애쉬..


1997년 그를 기리며 US오픈은 루이 암스트롱 스타디움을 대체해 만든 새로운 센터코트의 이름을 아서 애쉬 스타디움으로 명명해.


US오픈 센터코트 입구에는 아서 애쉬가 남긴 말이 써있어

Start where you are. Use what you have. Do what you can.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고

자신보다 젊고 강력한 챔피언과 맞서 싸우고

HIV 에이즈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맞서 싸운 아서 애쉬

그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 정신으로 흑인사회의 영웅이자 미국의 영웅으로 남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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