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킹 Feb 21. 2024

흥민 빌라 404 #2

아침이 오면

결국 그 여자는 술 먹고 새벽에 너를 유혹한 거구나?      

그렇지. 그런 거지. 그런데 나의 몸뿐만이 아니었어. 내가 밤새 번 내 돈까지 탐하더군.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온라인에 뿌렸지. 동영상 말이야. 결과는 대박이었지. 삽시간에 수백만 조회 수를 기록한 거 있지. 아마 천만 영화보다 그 뭐더라? 이순신 장군 나오는 거?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다고 했던가? 아무튼 그 영화보다 내 것이 더 빠르게 퍼졌을 거야. 생각해봐! 얼마나 멋지고 짜릿한 일이야! 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 같은 다큐멘터리가 세상 끝까지 무한히 번지고 있다고…. 정말 짜릿하지 않아?     

그래서 그 동영상이 너의 재판에 도움이 된 거야? 아니. 그 반대야. 판사의 분노만 샀지. 왜냐면 가장 결정적인 돈 이야기를 그녀가 꺼내기 전 나의 블랙박스를 그 사악한 년이 뜯어 버린 거 있지. 그러고는 자기는 술이 떡이 되어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고 발뺌한 거야. 그러니 내가 고스란히 뒤집어쓴 거고. 하지만 우리 변호사가 똑똑해서 양형 거래를 한 거지. 그래서 그렇게 된 거야.      

불행 중 다행이네.     

그렇지. 그만한 게 다행이지. 요즈음같이 무서운 세상에…. 다만, 한가지, 성범죄자에게 주어지는 주홍글씨가 출소 후에도 내가 집에 틀어박힐 수밖에 없는 수단이 되고 말았어.      

주홍글씨?      

그래, 그거. 전자발찌. 이거 차고는 아무 데도 갈 수 없어. 놀라운 과학 기술.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을 거야. 인공위성이 나를 졸졸 따라다닌다는 거. 그래. GPS. 나의 일거수일투족은 늘 경찰본부 모니터에 빨간 점으로 표시되지. 그러니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그냥 집에 콕 박혀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세상이나 구경하는 거지.     

내가 한 가지 재밌는, 나에 관한 사실 알려줄까?      

응, 그래. 뭔데?     

사실 나는 범죄 관련하여 악연이 많은 사람이야. 정말이지 재수가 더럽게 없는 인간인 셈이지. 내가 뜻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운명적으로 혹은 우연히 그런 몹쓸 일에 휘말리게 된 거야. 궁금하지?      

그렇게 자꾸 질문 식으로 말하지 말고 그냥 말을 해. 너는 그게 항상 문제야. 그냥 너가 말하고 싶고 자랑하고 싶고 떠벌리고 싶은 것을 그냥 말하면 될 것을…. 항상 입이 근질근질하잖아. 맞지? 그래, 그러니 그냥 말을 해! 꼭 상대방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하는 거…. 그거 정말 나쁜 버릇이야.      

알았어. 그럼 말할게. 미안해. 오랜만에 너를 보니 그냥 옛날 습관이 나와서 그런 거야. 이해해.      

오랜만이라니?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해? 줄곧 네 곁에 붙어 있었잖아. 너는 404호. 나는 504호. 천장 너머 내가 있고 바닥 넘어 너가 있는데…. 뭘 오랜만이라는 거야?      

아무튼 우리가 이렇게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거는 꽤 오래전이잖아. 나는 그 얘기야.      

그건, 너가 우울증에 빠져 꼼짝도 안 하고 구석에만 처박혀 있었으니까 그런 거지.      

그래, 알았어. 미안해. 너 마음 충분히 알고 있어. 이 세상에 마음 터놓고 이렇게 마주 보며 서로의 이야기를 나눌 친구는 이제 우리 둘뿐인 거…. 나도 잘 알지. 아무튼 미안해. 그동안 외롭게 해서.     

됐어. 지금이라도 너가 이렇게 나타났잖아. 그럼 된 거지. 뭐. 그래, 아무튼 너의 이야기 계속해봐. 어떻게 되었다고?     

하지만 우선, 이 이야기를 하기 전 나에 대하여 잠깐 기술하고 넘어갈게.     

사실 나는 숙맥이야. 말더듬이기도 하고. 물론 얼굴이야 좀 곱상하게 미남형이라고 다들 그러지만, 여자 앞에서 그 흔한 인사조차 하지 못할 정도였어. 그러니 학창 시절 연애는 꿈도 못 꾸었지. 그저 짝사랑 몇 번 하다가 끝난 게 다야.      

너도 나만큼 불쌍한 인간이구나. 하지만 내가 보기에, 내가 만약 너 정도의 허우대만 갖추었다면 여자 걱정은 안 하고 살았을 것 같은데….     

고마워. 빈말이라도 그렇게 말해줬어.     

아냐. 진심이야. 너가 워낙 안 꾸며서 그렇지! 본바탕은 차은우 못지않아. 진심이야.      

뭐, 사실, 가끔 내게 대시하는 여학생이 있긴 있었어. 하지만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종일 말 없는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는 이 세상에 단연코 단 한 명도 없지. 암, 그렇고말고.     

아! 그러고 보니 잠깐, 한가지가 생각난다. 이건 중요한 일이야. 꼭 너에게 자랑하고 싶은 일이지. 나의 학창 시절을 통틀어 가장 기이하고 짜릿했던 그 날. 그래! 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지. 너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보자 그러니까 그날이 언제였나? 틀림없이 군대 가기 전이었어. 왜냐하면 군 생활 내내 그날을 곱씹었거든. 아무튼 그날.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날. 나는 모처럼 만에 정장을 쫙 빼입고 외출했어. 아마 내가 정장 차림을 한 것은 신입생 환영회 이후 처음일 거야, 마저. 틀림없이 그랬어. 왜냐하면 처음 정장을 입었을 때는 헐렁하다고 느꼈는데 그날 옷을 입는데 조인다는 느낌을 받았거든. 살이 그만큼 찐 거지. 그만큼 즐겁고 행복한 대학 생활을 했다는 방증이기도 하고…. 아마 내 생에 가장 좋았던 순간을 그때뿐이었을 거야.     



매거진의 이전글 흥민 빌라 404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