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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킹 Feb 21. 2024

흥민 빌라 404 #3

아침이 오면

아무튼 나는 제법 멋진 모습으로 버스를 탔지. 승객이 꽤 많았어. 당연히 서서 갔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세한 느낌이 내 손에 전해지는 거 있지. 뭔가가 이상했어. 그래서 가만히 버스 기둥을 잡은 내 손을 쳐다보니…. 하하하…. 어떤 여학생의 손이 자꾸 내려와 나와 부딪히는 거야. 자자 자. 이 상황을 한번 속으로 그려봐 봐! 나는 지금도 그 순간이 막 떠오르거든. 버스 기둥을 잡은 내 손. 그 손 위에 하얗고 조그마한 손이 차츰차츰 내려오다가 내 손과 닿으면 다시 올라가는 거야. 그러고는 다시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내려와 다시 내 손과 닿는 거지. 어때? 상상되지?      

그래, 그녀는 의도적으로 그런 행위를 하는 거야. 즉,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내게 빠져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지. 나는 평소에 옷을 더럽게 못 입는 편이야. 아니 아예 신경도 안 쓰지. 내가 생각하는 옷의 개념은 단 하나야. 보온용. 그러니 어디 외출할 때면 먼저 눈에 띄는 아무거나 입고 돌아다니지. 즉, 늘 후줄근하거나 밋밋하지. 이런 타입의 인간이 딱 한 가지 빛을 발하는 순간이 있는데 그때가 언제인지 알아? 그래, 그거야. 어느 날 갑자기 친구나 친척, 혹은 지인들 앞에 바로 쫙 빼입고 나타날 때지. 그러면 주변 사람들은 모두 화들짝 놀라 감탄을 금치 못하지.      

“와! 하마터면 몰라볼 뻔했다!”     

“와! 이게 누구 신가? 내가 알던 그 사람, 마저?”     

“와! 숨겨진 비경이 따로 없네!”     

나는 그날 내 옆에 서 있는 그 여학생을 통해 순간적으로 치밀어오르는 자신감을 느꼈지. 즉, 나를 쳐다보는 모든 이의 시선에는 같은 느낌이 배어있는 거지.     

“와! 정말 잘생겼다!”     

나는 당당하게 버스에서 내렸어.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몇 걸음 뒤에서 따라 오더군. 나는 쾌재를 불렀지. 물론 그녀는 내 유형은 아니었어. 뭐랄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못생겼어. 크고 둥근 안경을 쓰고 입, 코, 눈이 모두 작았어. 키도 작고 가슴도 밋밋했지. 하지만 나는, 하늘이 주신 다시 없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어. 바로 성적 호기심 말이야.      

너도 한번 생각해봐! 눈부신 이십 대잖아! 질풍노도의 시기! 치마만 스쳐도 불끈불끈 아랫도리가 발광하던 그런 시기잖아! 하지만 내 신세가 그때까지 어떠했는지는 내가 말했잖아. 비참했지. 여자 친구가 없는 극소수의 좀생이 대학생. 바로 나지. 내 친구들은 만났다 하면 지난밤을 스쳐 간 황홀했던 정사에 대해 침을 튀기며 자랑하던 그 고통의 순간을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견뎌야 했던 그 시절이었단 말이야. 그러니 내가 어떠했겠어?      

굳은 결심을 했지. 꼭 저 여인을 잡아야 한다! 누가 뭐래도 이번에는 꼭 총각 딱지를 떼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몇 글자를 적은 뒤 종이를 찢어 그녀에게 건넸지. 그녀는 냉큼 받을 줄 알았는데 약간 주춤거리더군. 평소의 나라면 틀림없이 그 자리에서 물러났을 거야. 암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지. 소크라테스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나는 나 자신을 잘 알거든. 하지만 그날은 달랐어. 원인을 알 수 없는 강한 자신감이 나의 통제를 벗어났거든. 세상의 모든 여인이 나를 끔찍이 좋아하는 것이 틀림없다는 심한 착각을 품을 수밖에 없게 만든 멋지고 광택 나는 정장. 나는 당당하게 그녀의 앙증맞은 손을 잡고 나의 쪽지를 건넸지.     

물론 그 쪽지에는 약속 장소와 시간이 적혀있지. <디토텐> 카페 일 층. 저녁 7시. 나는 일 층에다 밑줄을 쫙 그었지. 왜냐하면 그 카페는 모두 4층으로 이루어져 있거든. 즉, 모든 층이 카페인 거지. 내가 그 카페로 정한 이유는 간단해. 친구에게서 들은 정보가 있거든. 일 층은 그냥 개방된 보통의 카페야. 뭐, 스타벅스 같은 곳이지. 2층은 약간의 칸막이가 있고 파스타 같은 음식과 맥주, 칵테일 정도를 음미할 수 있지. 인테리어 조명이 있고 일 층에 비하면 약간 어두운 편이지. 3층으로 올라가면 조명은 더욱 어두워지고 칸막이는 더욱 촘촘해지지. 양주와 안주가 제공되지. 음악은 크고 신나지. 그리고 마지막 4층. 그래 너가 생각하는 바로 그거야. 완전히 밀폐된 공간. 음악은 끈적끈적하지. 중저음의 색소폰이 은은하게 각각의 공간을 감싸며 흘러내리지.      

마저. 너가 상상하는 그것. 과도한 스킨쉽으로 이끄는 황홀한 칸막이. 만약 너가 1, 2, 3층을 모두 거쳐 이곳까지 올라왔다면 너는 알코올이 증폭한 본능에 중독된 채 헬렐레하며 그녀의 피부에 집착하는 한 마리 귀여운 범고래로 변신해 있음을 느낄 거야.     

그리고 그날. 그래. 내가 자신 있게 말했잖아. 내 학창 시절을 통틀어 가장 기이하고 짜릿했던 그 날이라고. 자정 알람이 은은히 메아리치던 그 순간 우리는 칸막이가 주는 안락함에 젖어 뜨겁게 서로의 혀를 탐닉하고 있었지. 그리고 모텔로 향했지. 당연한 절차 아니겠어? 나는 비로소, 마침내 내 친구들이 그렇게 입이 마르게 자랑하던, 그동안 내 귀에 대고 고통의 망치질을 해 마침내 내 영혼까지 멍들게 했던, 그 러브모텔의 내부를 내 두 눈으로 똑똑히 관찰했지. 아! 정말이지, 그 황홀함은!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온몸이 후드득 떨려. 내 안의 주홍글씨.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는 그 총각 띠를 마침내 뗀 거지.     

나는 그때를 표현한 가장 멋진 것을 알고 있어. 이것과 아주 흡사하지. 이효석의 그 유명한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 그래, 바로 그거와 아주 흡사해. 장돌뱅이 허 생원이 주야장천 이야기하고 회상하는 바로 그것. 첫 경험. 세상을 다 가진 그 쾌락의 꼭짓점. 비로소 제대로 된 인간으로 거듭났다는, 그 절정의 안도감. 나는 밤새도록 잠 한 숨자지 않고 그녀에게 아낌없이 내 모든 것을 다 주었지. 그리고 거의 산 송장이 된 채 숙소로 돌아온 나는 거의 사흘 정도를 누워있었지.      

그 사흘 동안 내 속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어. 아무튼 확실한 거는 하루하루가 갈수록 그녀에 대한 나의 끌림이 빠져나가고 있었다는 거지. 즉, 사흘째 되던 날 나는 그녀의 연락처를 휴지통에 버리고 말았지.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병신같은 짓이었어. 후회막급이지. 얼마든지 더 즐길 수도 있었는데. 그냥 그렇게 보내기에는 너무 아까웠었는데. 아무튼 그때는 그랬어. 뭐랄까 그냥 알 수 없는 자신감으로 꽉 차 있었어.      

그런 거 있잖아. 산악 그랜드슬램 같은 거. 세계 8,000m급 14좌와 7대륙 최고봉, 세계 3극점을 모두 등반한 최고의 산악인. 하지만 그도 첫 등반에는 극도의 두려움을 느꼈을 거라는 거지. 하지만 생각보다 좋은 날씨, 훌륭한 가이드를 만나, 뜻한 것보다 손쉽게 등반에 성공했다면 그의 두 번째 등반은 자신감이 하늘을 찌를 수밖에 없을 거야. 나도 그런 거지. 의외로 쉽게 등반을 하자마자 간악함이 끝 간 데 없이 솟아올랐던 거지. 그래서 좀 더 멋지고 좀 더 기대치에 부응하고 좀 더 섹시한 여인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허황한 믿음을 갖게 되는 거지.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 그때 그 여자에게 만족하고 그냥 평범한 인생을 살았으면 어땠을까? 하고. 그랬으면 내 인생은, 어찌 보면 좀 지루하거나 심심했을 수는 있었겠지만, 지금처럼 성범죄 전과자로 낙인찍힌 밑바닥 인생을 살지는 않았을 거라는 거지. 하지만 어쩌겠어. 모든 가치 있는 순간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법. 그러니 그게 인생이지. 삶이 모범 답안처럼 그렇게 깍듯하고 반듯하게 구성되어 있다면 그건 인간의 인생이 아니지. 그냥 머스크 형님이 말씀하신 데로 그건 그냥 시뮬레이션 된 세상의 꼭두각시일 뿐이지. 암, 그렇고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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