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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킹 Feb 29. 2024

장미와 이빨 #3

2. <이름 없음>으로 방문하는 곳

문 앞에 섰다. 붉은 문. 푸른 네온사인. 거친 천장. 찢어진 팻말. 알 수 없는 문자. 떼가 잔뜩 낀 손잡이. 헬레나가 조용히 문을 두드린다. 그녀는 나의 훌륭한 교량.      

문이 열리고 여자가 나타난다. 꾸밈이 없는 얼굴.     

“게리네빌 돈디 박사를 찾습니다.”     

“그럼, 당신이 아무런 이름 없이 메신저를 보낸 자인가요?”     


여자가 낮은 전자음에 맞추어 입을 움직인다. 조잡한 사이보그. 누가 봐도 초기 작품. 로봇이 뒤뚱거리며 무대 위에 올라 인간의 장단에 맞추어 벙거지 춤을 추던 그 시절, 그런 작품이 틀림없다. 호언장담한다. 왜냐하면 나는 잘 알고 있다. 훨씬 전에, 그러니까 헬레나를 얻기 훨씬 이전에, 그날 밤에 내가 되새김질하며, 꽤 많은 돈을 아껴서 겨우 장만한 조잡하기 이를 데 없는 섹스돌. 그것은. 그래. 나는 그것이라고 명했다. 너무 화려하고 지나치게 풍만하고 온갖 선정적인 것들로 도배를 하였지만 나는 그녀라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정이 넘으면 자동으로 몸에 걸친 것을 벗어버리고 주인님의 옷가지도 모두 허락 없이 벗기는 기계였다. 그러므로 나는 왜 인간이 자정만 넘으며 그 짓 – 그래, 그것은 확실히 그냥 짝짓기라고 해두자 –을 하도록 설계를 했는지를 의아해했던 일을 십중팔구 떠올리게 될 터였다.     


“맞습니다. 박사는 계시는가요?”     

그녀의 조잡한 눈두덩이 살짝 흔들린다.      

‘무슨 생각이 언뜻 스친 걸까?’     

“보안상, 인간만 출입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음정이 경고음 수준으로 올라간다. 헬레나는 복도에, 나는 신발을 벗고 바닥으로 올라섰다. 차가운 바닥. 두 발뿐만 아니라 양 무릎까지 시리다. 나는 방안을 장식하는, 축 늘어진 장식품을 훑어내린다. 퉁명스럽기 짝이 없는 것들. 나는 그녀 뒤에서 그녀의 보폭에 장단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박사가 나의 이야기를 듣기 바란다. 그것뿐이다. 나의 이야기에 관심이 끌리도록 믿고 싶은 것은, 그 이야기가 나의 과거와 시간 속으로, 혼탁한 이정표에 대한 관계를 설정하도록 내버려 둔 세상의 도촬을 제공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가 추슬러서 마련하도록 심어둔 미래의 기대치와 가능성 때문이다. 나는 성인이 될 때까지 목적 없이, 대부분 형편없이, 쓰레기 같은 것을 위해 쓰였고, - 물론 거의 모든 생존 인의 나사가 다 빠진 채 허우적거리던 시기임은 확실하지만 - 그 애절한 인생사에 대해 차고 넘치는 기록 속에 내가 온전히 내세울 수 있는, 나만의 것을 어디에 집어넣든, 아귀가 딱딱 떨어지는 나만의 것으로 나가야 한다는 강박으로 숨을 쉬며 살아왔다. 당연하게도 비로소 이것만이 나를 움직이게 되었다. 어쩌면 진실. 어쩌면 그 이면의 거대한 거짓에 대한 깨달음. 직관 속에 움직이듯 부동의 고요함을 지닌 어떤 존재 자체에 대한 냉정한 판단.    

 

그것을 그에게 물어보고 알아야 한다. 대부분 형편없이 그려지고 이어졌으며, 거의 모두가 검증을 외면하여 남지도 않았지만, 끝끝내 일면의 한 조각이라도 건질 수 있다는 신념이, 그러한 형식이 마음을 끌고 말았다.     

두 개, 세 개, 네 개의 문이 열리고 마침내 점점 더 가운데가 밝은 곳으로 이어졌다. 그녀를 따라가는 발걸음에서 가쁜 호흡이 들린다.      

“미안해요. 이름 없는 손님. 보안상….”     

“괜찮아요. 다들 이렇게 하고 살잖아요.”     

“물론, 그렇습니다. 애써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박사님은 30년 냉동 수면을 거쳤습니다. 즉, 아마겟돈 이후 급속 냉동을 선택하셨고 아광속체를 통해 4, 37광년 떨어진 광파 센터 우리에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아마겟돈 직후라고 하셨나요?“     

”아, 네. 죄송합니다. 저는 기독교인입니다. 그러므로….“     

”네. 물론 이해합니다. 보편적 용어의 통일성을 주기에는 그동안 세상의 혼잡이 컸으니까요. 하지만 이해되므로 그다지 신경이 쓰이는 부분입니다. 그럼, 언제 깨신 건가요?“     

”얼마 되지 않습니다. 4주 2일 17시간 전입니다. 그래서 체내에 남아 있는 0.16 퍼센트의 냉동보충제로 인한 독성 현피 상태입니다.“     

”그럼, 제가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박사님의 기억에 대한 진실성이 신뢰를 의심해 볼 만하다는 수준입니다. 즉, 사고의 연속성, 수려성, 완성도, 진실성, 이해도, 단속성 모두가 아직은 불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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