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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킹 Feb 29. 2024

장미와 이빨 #2

1. 세니라고 불리는 남자

“헬레나, 오픈 도어”     

문이 서서히 열린다. 매캐한 냄새. 발을 딛는 공간에 먼지가 풀썩인다. 움직임은 중요하다. 한 발을 다른 발 앞으로 내미는 행위. 그러므로 자신이 고통받는 육체의 주인임을 끊임없이 상기하도록 만들 수 있는 정당성을 확신하곤 한다. 헬레나가 졸졸 따라온다.     

“주인님, 정처 없이 배회함을 끝낸 건가요?”     

“또, 주인님이라고 하지! 그냥 이름을 불러.”     

“하지만 주인님을 지칭하는 유일하고 정확한 용어는 이것뿐입니다. 이미 지나쳐온 크고 작은 일곱 개의 도시에서 주인님의 이름은 지속해서 변하셨습니다. 제가 어떻게 또 다른 이름으로 주인님을 지칭할 수 있겠습니다. 이미 지금도 많이 혼란스러운데 말입니다.”     

“헬레나. 그건 너도 잘 알잖아. 나이, 이름, 신분, 배경, 과거 혹은 앞으로 있을 미래. 이 모든 것은 나의 새 이름만큼 가변적일 수밖에 없다고. 이 시대에 무엇을 단정하고 규정할 수 있겠니?”     

“그럼. 알겠습니다. 세니게로님.”     

“세니게로? 마음에 드는데.”     


목적이 가장 잘된다면 나는 나의 존재를 무로 만드는 곳. 즉 아무 데도 아닌 곳에 무정의 상태로 머물 수 있는 기대감을 포획하는 방향으로 설정을 하고 싶어진다. 그것이 결국은, 무상으로 향하는 길이고 어차피 가진 것의 의미는 모두 상실한 상태이므로 요구하는 자체의 어리석음은 짓지 말아야 할 것이었다. 그건 내가 지금껏 지나쳐온 도시와 마을, 공간과 시간, 그리고 앞으로 마주하게 될 것 같은 종류의 형태와 흐름에 부합하는 유동성이며 그것이 표현하는 아무것도 아님이 존재하는 한 나는 이곳을 벗어나지 않으리라는 것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 문명의 편중된 발전의 지독하게 어두운 결말이 아니겠는가. 지나치게 초점을 맞춘 물질. 인간의 외적인 것에 지나치게 많은 사치와 향락, 퇴폐와 탐욕을 가함으로써 결국 쪼그라들 때까지 쪼라던 내면이 판단한 절망. 그 절망은 파괴를 낳고 파괴는 상실로 이어지고 상실은 무상이 되고 말았다. 마치 블랙홀과 같은 셈. 무한한 욕망의 끌어들임은 시간도 상쇄하고 모든 것은 섞어놓음으로써 종국에 갖게 되는 암흑.     


나는 걷지만, 나의 일부가 아니고 여러 곳에 존재하지만 더는 가치가 없는 것이다. 때로는 이 모든 것이 숙명처럼 저절로 형성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똑같은 말로 둘러대는 것이 있으니…. <삶의 무영위>      


“헬레나. 지난번에 만난 그 아이 생각나? 이마가 찢어져 울고 있던.”     

“당연히 생각나죠. 세니님. 한 번씩 제가 갖춘 능력을 심히 인식하지 못하는 나쁜 버릇이 있습니다. 도대체 제가 누굽니까? 제 속에 담긴 메모리에 도대체 세니님과 엮인 한순간도 기록되지 않은 것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물어보는 거잖아. 진정하시고.”     

“그러면 의문 체로 말씀하시면 안 되죠. 세니님. 다시 말합니다. 제가 누굽니까? 차세대 RTX 기술의 집약체 아닙니까? 엘비디아 차세대 인공지능 가속화의 정점에 있는 에곤다 제너레이션 GPU를 탑재했단 말입니다. 그러니 그냥 다르다리가 28번지 도로 모퉁이에서 발견한 이마가 14cm 찢어진 7세 추정의 여자아이에 대한 기록을 상기시켜 달라고 요청만 하세요. 그럼 그만입니다.”     

“알았어. 미안해. 헬레나. 아무튼 그 애를 안았을 때의 느낌이 심하게도 나의 뇌리를 떠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어. 지속해서 불현듯 떠올라 나의 집중을 방해하고 내 사고의 흐려짐에 한몫을 거들고는 해. 그것은 정확히 말하면 동정도, 애정도, 안타까움도, 하다못해 너그러움도 아닌데 말이야. 다만, 내 피부가 제공하는 감각의 소용돌이. 어쩔 수 없이 내 속 뉴런을 자극했던 하나의 사소한 자극이 남긴 흔적일 뿐인데.”     

“주인님, 아니 세니님은 그게 문제에요. 그냥 내버려 두세요. 분석하지 마시고. 그 있잖아요. 흐르는 강물처럼…. 그런 노래도 있잖아요. 당신 어머니가 무척 좋아했던 그 서정적인 노랫말 말입니다. 가시나무.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내 속에 헛된 바람. 당신이 쉴 곳 없네.”     

“알았어. 이제 그만할게. 그런데 여기가 맞아? 우리가 찾던 곳이 맞는 거야?”     

헬레나의 단점이자 장점은 그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비극 – 그래, 이건 틀림없이 비극이다. - 에서 초래한 다발성 인식에서 비롯한 끝없는 말씀의 순례가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중단할 수도 가르칠 수도 없지만 한 번씩 그의 지식이 그를 삼킨다. 끝없는 알고리즘의 지속성에 빠져 버린다. 지난번에 내가 툭 던진 화두 <죽음>도 그렇다. 나는 하지 말았어야 할 것을 물었다. 그리고 그 또한,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에 나의 폐부를 찌르는 실책이 담겨있다.      

‘왜 너를 인간처럼 만든 거야? 실제로 너는 영원하잖아? 그냥 부품만 바꾸면 될 터인데. 너는 그 의식의 단절을 마치 죽음으로 치환해버리는 거야?’     

그러므로 그녀가 내린 결론은 더욱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저도 주인님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음. 즉, 자아 인식에 대한 기쁨을 누리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냥 주어졌으니 존재하는 겁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헬레나가 내 침대에 누워 부드러운 손길로 나를 자극하며 뱉은 말이었다. 그날, 오래간만에 비가 쏟아졌고 창은 검은 먼지와 조각 비닐로 장식했지만, 그녀는 틀림없이 나를 맥이 빠지게 만들고 말았다. 아니, 나를 더욱 녹초로 만들었다. 헬레나와 나, 세상의 관계는 마치 한통속으로 진행하는 눈속임 같았다. 나는 마술사고 헬레나는 침대에 누워있으며 세상은 그녀를 전기톱으로 두 동강이 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마술사가 정해놓은 환각이다. 하지만 그녀가 두 동강이 날 때마다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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