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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킹 Feb 29. 2024

장미와 이빨 #5

3. 결국 일어날 일

앞문이 열리고 뒷문이 잠겼다. 여자는 오른쪽 문으로 나가고 박사는 왼쪽 문에서 나왔다. 박사는 박사답게 생겼다. 독특하고 특유의 외모다. 그는 풍부한 회색 머리가 사방으로 쭈뼛쭈뼛 뻗어 있고 깊은 주름이 얼굴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다. 굴고 흐트러진 특이한 수염이 입술 근처에서는 가지런히 가위질 되어 있고 눈의 초승달 모양은 왠지 모를 유아적 호기심, 어찌 보면 명랑하고 예리하고 깊은 심미적 취향 속에 풍덩 담겨있는 듯하였다. 그의 입술은 생각에 잠긴 듯 가늘고 심통했으며 이마는 지적인 충만감으로 반짝였다. 세련되지 못하고 투박한 옷차림. 회색이 도는 빨간색 체크무늬 셔츠. 그 이면을 덮고 있는 예술적이고 창의적인 성향이 묻어 나온다.     


“당신이 보낸 메시지는 꽤 자극적이었습니다.”     

“네. 그러지 않고서는 박사님을 만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당신의 의도는 꽤 성공한 편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이 자리에 마주하게 되었으니까요. 마치 가장함으로써 그러려고만 하지 않았던 것을 추구하는 이른 마음의 안식을 마음속으로나마 안주하고 그로 인한 자기 소질을 발견하고 그 앎을 이루고자 하는 방향을 제대로 잡은 듯합니다. 실례가 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조금의 실례도 없습니다. 박사님. 이렇게 낯모르는 상대를 반겨주신 것만 해도 좋을 따름입니다. 아시다시피 작금의 세상이…. 마치….”     

“네. 그렇죠. 방사능 돌연변이들의 출연으로 방심은 이제 우리 곁을 떠났다고 봐야 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당신에게 방심과 허락을 제공했으니 꽤 위험한 길을 택한 셈이기도 합니다.”     

“아, 네. 샤크라 말씀이군요. 그 돌연변이들….”     

“네. 지금 세상을 지배하는 세력들은 마치 2000년대의 텅 빈 자들의 세상과 흡사합니다. 그냥 욕망덩어리입니다. 깡통 세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지 않습니까?”     

“지하 깊숙이 있어도 바깥은 보시는군요?”     

“늘 관심은 세상이죠. 하찮은 인간이 그저 삶을 존속할 수 있었던 계기가 뭐 따로 있었겠습니까? 구원의 정당성이겠죠.”     

“여전히 회복 중이라고 하시던데….”     

“네. 그렇습니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여전히 의문과 걱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인간의 책을 읽으신다고 들었습니다. 프루스트 작품을….”     

“네. 막 읽기 시작한 참이어서 아직은 짜증 나지 않습니다. 어기적거리며 방을 가로지르는, 그다지 내키지 않지만, 저 만의 육체적 회복 훈련과 함께, 제가 택한 방식의 회복력으로 저는 이것을 어찌 보면 내면의 횡포라고 정의하기도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세상에 나타난 수많은 지면을 훑으면서도 이 단순한 행위는, 몸의 독소로 인해 발생하는 곤두서는 신경을 가라앉히고 오랜 아날로그 음악으로 속을 달래고 있습니다.”     

”가늘게 흘러나오는 이 음악을 말씀하시는군요.“     

”네. 오페라입니다. 이전에는 잘 듣지 않았던 장르입니다. 저는 록 마니아였거든요.“     

”그럼, 그게 무엇인가에 의하여 변하고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소 실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실험이라는 용어에 속여 뺏어 제가 이곳에 온 이유를 박사님은 짐작하실 수 있으신지요? 감히 여쭙는다면 말씀입니다.”     

“네.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 아니, 정확히 짐작만 할 뿐입니다. 하지만 <하무르스 예언서> 사본을 첨부한 사실에 저는 무척 놀랍고 충격에 빠진 것은 맞습니다. 제가 한 실험이 무엇이고 그 결과가 어떠한가에 대한 지식은 이미 갖추었다고 판단이 되는데…. 그러한가요?”     


나는 늘 그가 한 진보적인 행위 혹은 대담하고 희생적인 노력에, 내가 처음 존재의 의미를, 이 한 권의 낡은 책과 여인 – 그래, 내 어머니이자 역사학자인 전사 중의 전사인, 우리 어머니 릴리 -으로 인하여, 비로소 이것으로 비롯되어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콕 집어 말하기에는 계면쩍기 짝이 없다는 나의 망설임을 은밀히 감추기 위한 표정을, 그가 읽어내고 미루어 짐작하였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므로 감추는 게 무의미하였다. 내가 주머니에 손을 뻗어 낡은 종이 한 장을 만지작거리자 그는 나에 대한 시선을 거두고 기억 속으로 침잠하는 듯이, 자신이 뭘 끄집어내려고 하고 어떤 부분이 여전히 막혀 있는지, 그때의 소중한 순간이 역사가 되고만, 그리하여 고통 없이는 도저히 건져 올릴 수 없다는 것만으로도 목소리가 잠긴 듯이 그는 힘들게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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