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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킹 Feb 29. 2024

장미와 이빨 #6

3. 결국 일어날 일

“네. 실험은 실패했고 예정된 종말은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순식간에 그의 모습은, 안도감이 사라지고 불안감이 덮친 듯 보였다. 잠깐 손에 쥐었던 평온함은 온데간데없어졌다. 나는 애써 거부하려고 <하지만>이라는 단어를 뱉은 것에 다수 주눅이 들었다. 박사의 말이 나의 정수리에 박히고 폐부를 찔렀다.     

“누가 당신을 배신했나요?”     

나는 조급하게 이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그래, 역사가 기록한 저항 조직. <사피엔티아>. 13인으로 구성된 이들은 AI 제국이 마련한 <지구 리셋> 계획을 진작에 파악했다. 하지만 예언서는?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맙니다.”     

알고말고요. 네. 이미 세상은 멸했고 우리는 흩어졌습니다. 물질의 팽배함이 낳은 사고의 저급함은 항상 같은 결과로 이어질 뿐입니다. 격식만이 요란한 옷장의 화려한 옷가지들 틈새로 수수한 성품의 헝겊 쪼가리 하나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죠. 어머니는 그의 저서에서 그렇게 말했다. 헝겊 쪼가리. 나는 지금 그 쪼가리를 준비하고 실행에 옮긴 이의 누추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그의 과거가 그를 휘두르는 것 같았다. 반쯤은 넋이 나간 상태. 선명하고도 덧없는 그림자가 드리워진 구겨진 얼굴. 마치 죽은 자들에게 넘겨진 것처럼 창백하고 준엄해 보이는 자세.      

그의 공간에, 사방의 벽을 장식한 푸른 지도 조각 – 한 때, 인간이 푸른 지구라고 부르던 – 과 손바닥만 한, 불투명도가 최고에 달한 창문을 통해 비실거리듯 들어와 흩어지는 빛. 그리고 그를 에워싸고 있는 절망과 좌절. 별안간 나는, 그의 실패가, 아니 오히려 그의 노력 자체에 담긴 일은, 어떤 의미에서도 결과의 심판이나 판단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용기를 내어 말했다.     

“하지만 노력하지 않았습니까?”     

로비로 통하는 문에 박힌 연속전인 전구들이 푸른 빛에서 붉은빛으로 바뀌었다. 여인이 들어왔다. 그녀는 내게 시선을 주고 고개를 끄덕이고 약간 틀었다.     

“박사님의 상태가 그다지 강건하지 않습니다. 잠시 휴식이 필요합니다. 괜찮으시다면….”     

나는 그의 상태가 예상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사실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내가 오기 전 목적에서 나아간 게 아무것도 없다. 박사에게 나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나를 평가하고 어떤 면에서 내 존재 이유를 주지하기에 그의 시간은 너무 각박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따라 지나온 복도로 다시 나와 갈림길에서 생소한 복도를 거쳐 작은 공간으로 안내를 받았다. 헬레나가 옆에 앉아, 호기심 어린 둥근 눈으로 나의 첫 말을 애타게 기다렸다.     

“박사가 온전한 기억으로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기다릴 수밖에 없잖아? 그렇지?”     

나는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마치 연인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보는 관점에서는 육감적이라 할 수 있는 그녀는 내게 고개를 기대며 속삭였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기억에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알잖아요. 인간의 기억은 지독한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을….”     

“그래, 그건 그렇지. 나도 그러하니까. 내가 기억된 일과 내 어머니의 공책에 남겨진 같은 일들이 완전히 뒤집힌 예도 있었으니까.”     

“정말?”     

“그래, 정말이야. 내가 초등학생 때 편의점에서 껌을 훔쳤다고 신고가 들어왔는데 나는 누명을 쓴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거든…. 왜냐하면 나는 껌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만약 훔쳤다면 피규어 같은 것을 훔쳤겠지만….”     

“그런데?”     

“그런데 아니었어. 꼼꼼하기 짝이 없는 우리 어머니. 정말이지 섬뜩할 정도로 모든 것을 기록은 남기시는 어머니가 그냥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지. 모든 나의 기록을 낱낱이 살핀 거야. 내가 나간 시간, 돌아온 시간, 골목에 머무른 시간, 편의점 근처를 지나간 시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확연히 보여주는 CCTV까지….”    

 

“그래서 결국, 당신이 범인이라는 것을 밝혀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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