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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mo Kang Mar 08. 2019

겨울이 오면. 통영.

오히려 겨울을 기다린다. 세상 어느 바다와 섬이 부럽지 않을 여름의 통영을 지나면서도, 어떤 이들은 결국 찾아올 겨울을 기다린다. 그리고 겨울이 오면, 천천히 느린 배를 타고 섬으로 간다. 겨울이 아니면 만날 수 없는 통영이 거기에 있다.



취하지 않고서는 견디기 힘든 긴 겨울밤을 보낸 나그네에게, 어떤 여행은 온전히 아침의 한 그릇 시원한 해장국으로 남을 수도 있다. 통영의 겨울 아침, 그들이 '미기국'라고 부르는 물메기탕으로 속풀이를 하게 된다면 어쩌면 당신도 이제 그중 한 명이 된 것이다. 어부들이 못생긴 물메기들과 함께 항구로 돌아오기 시작하면 당신은 이미 어느 작은 다찌집에서 다음 날의 해장을 기대하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테니.


한 때 쓸모없다고 잡혀도 다시 바다에 버려 '물텀벙'이라고 불리던 물메기는 동해나 서해에서도 잡히지만 거의 절반이 경남을 중심으로 한 남해에서, 그중 절반이 통영 앞 추도 근해에서 잡힌다. (추도가 물메기의 섬이 된 데에는 바다로 탁 트인 추도의 위치와 민물이 풍부한 것도 이유가 되었다.) 미조마을 선착장. 남정네들은 잡아온 물메기들을 배에서 내리고 마을회관 앞 공동 상수도에는 아낙들이 산처럼 쌓인 물메기들의 등을 갈라 내장을 꺼내고 몇 번이고 맑은 물로 씻어내느라 바쁘다. 산기슭을 따라 오르는 마을 전체엔 바람과 햇볕이 닿는 곳이면 어디나 물메기들 천지다. 황태처럼 덕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골목 담벼락, 폐교 운동장, 마당 평상, 지붕.. 겨울 추도엔 어디나 물메기다. 아낙들은 품삯도 물메기로 받는다. 생물로 통영 장에 내다 팔기도 하고 말려서 한 축씩 도매상에 넘기기도 한다. 요즈음의 물메기는 인기도 좋고 시세도 좋다.  



말린 물메기로 만드는 찜을 더 좋아하는 이들도 있지만 해장으로는 생물 물메기탕이다. 겨울이어야만 하는 까닭이다. 비린 맛이 없고 기름기도 없는 물메기를 통영에서는 끓는 물에 무와 물메기만 넣고 간을 해서 맑게 먹는다. 동해에서는 김치를 넣고 서해에서는 조금 얼큰하게 끓이기도 하지만, 통영 물메기탕은 맑게 마신다. 부드러운 물메기 살은 씹힐 것도 없이 스르르 위로 넘어가 술꾼들의 속을 풀어놓는다. 통영의 대부분의 식당에선 겨울 음식으로 물메기탕을 낸다. 대항마을 선착장의 이름 없는 슈퍼에서도 물메기탕을 맛볼 수 있다. 뽈락김치와 뽈락구이, 해풍으로 자란 나물들. 그리고 커다란 스테인리스 그릇에 무심히 담겨 나오는 뜨거운 '미기국'. 들판에 쑥이 나고 바람 사이에 살짝 온기가 스밀 때 즈음이면 식당들의 메뉴판의 '물메기탕'은 어느 사이엔가 '도다리 쑥국'으로 바뀐다. 그때가 통영의 봄이다. 그때까지는 통영은 물메기. 겨울인 게다.



겨울 통영을 대표하는 음식은 사실 굴이다. 전국 생산량의 70퍼센트에 가까운 굴이 통영 근처에서 나온다. 굴 전문식당도 많고 어디서나 좋은 굴을 만날 수 있다. 오래전 어느 겨울밤, 통영운하를 넘는 충무교 아래에서 작은 노점을 만났다. 붉은 비닐 포장 속에서 노인은 투박한 냄비에 굴을 가득 담아 연탄불 위에 올렸고 우리는 말을 하면 그 순간이 사라질 것처럼 조용히 서로의 술잔을 채우며 굴을 먹었다. 그 뒤로는 그 노인의 노점을 만날 수 없었지만 여전히 겨울의 통영은 굴이다. 생굴, 굴무침, 굴찜, 굴구이, 굴국, 굴전.. 뭐든 상관없다. 



통영을 떠난 배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장사도 선착장에 닿는다. 'CAMELLIA 장사도 해상공원'. 사람이 떠나버린 작은 섬에는 이제 동백꽃이 있다. 10만 그루의 동백을 비롯해서 섬의 자생 꽃들을 품은 공원과 오래전 외로운 섬의 아이들의 기억을 담은 초등학교 건물이 있다. 어느 드라마에서 별에서 온 도민준이 천송이를 초능력으로 불러와 프러포즈를 했던 작은 동백터널길이 이 곳에 있다. 그래서인지 장사도로 가는 배에는 커플이 많다. 겨울 동백꽃 아래에서 말해진 그 많은 약속들은 계절이 지나 후드득, 그 붉은 꽃들이 송이째 떨어진 뒤에도 유효한 것일까. 어쩌면 이 작은 무인도에서 다음 겨울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붉은 동백은 다시 피겠지만 사람의 마음은 알 수가 없다. 그것이 한 때 사랑이라고 불린 것이었다고 해도.



장사도를 떠난 배가 통영으로 돌아올 때면 짧은 해가 저문다. 마지막 낚싯대를 거두는 남자도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다시 강구안과 항남동의 골목들엔 오래전 그들처럼 또 겨울밤을 견디지 못하는 이들이 유령처럼 배회할 것이다. 하지만 혹시 그렇게 밤을 버텨내고 새벽을 맞거나 혹은 밤차를 타고 새벽에 어두운 터미널에 내리게 된다면, 통영에선 서호시장에 가 볼 일이다. 다섯 시면 벌써 여기저기 모닥불이 피워진다. 솥에서 올라오는 김이 골목까지 나오면 일단 시락국밥집구석에 앉아 인사를 해야 한다. 역시 추운 겨울 아침 국밥만 한 게 없다. 조금 풀어진 몸으로 시장길로 나왔을 때 새벽어둠 속에서 길다방 커피를 만나게 된다면 당신의 오늘은 시작이 좋다. 그리고 언젠가 그 설명하기 쉽지 않은 묘한 통영에서의 이 순간이 생각날 것이다. 계절이 지나 다시, 겨울이 오면. 



2018년 1월, 어느 회사 사보에 실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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