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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mo Kang Mar 08. 2019

아라칸. 잊혀진 제국의 흔적

미얀마의 서쪽, 라카인

공항이 맞을까 싶은 작은 건물에는 나른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공항 벽에서 처음 만난 문구는 외국인 방문 금지구역 리스트였다. 이 곳은 미얀마의 가장 서쪽, 라카인 주의 주도 시트웨. 거대한 아라칸 산맥으로 가로막혀 비행기를 타고 오는 게 일반적이다. 군사정부가 물러났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많은 민족자치주들과 관계가 편하지 않은 미얀마에서 라카인 이야말로 가장 뜨거운 지역이다. 방글라데시와 국경을 맞댄, 로힝야 족이 살고 있는 곳. 하지만 여행자들이 주로 찾는 시트웨나 므락 우에는 로힝야 족은 물론 무슬림도 많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옛 아라칸 제국의 쇠락한 수도의 빛바랜 영광만 만날 뿐이다.



시트웨의 바다로 해가 진다. 저 벵골만 너머엔 인도가 있다. 자동차가 달릴 만큼 단단한 검은 해변에선 오늘도 청년들이 맨발로 공을 찬다. 다른 아이들이 하나 둘 사라진 뒤에도 붉은 조명 속에서 혼자 공을 차던 아이도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오래된 도시에 밤이 오면 뜨거운 낮에는 보이지 않던 남자들이 어디선가 나타난다. 미얀마의 겨울은 비가 오지 않는다. 덥고 메마른 매일이 반복되고 남자들은 플라스틱 테이블에 마주 앉아 맥주잔을 기울인다. 한 때 벵골의 동쪽을 호령하던 옛 아라칸 전사의 후예들은 이제 맥주를 마시며 옛날을 이야기하는 것 외엔 할 일이 없다.


라카인을 찾는 여행자들은 대부분 므락 우(Mrauk U)로 간다. 옛 아라칸 제국의 수도. 바간 못지않은 수많은 불탑들이 도시 전체에 가득하다. 아이들은 불탑 위를 뛰어다니며 놀고 여자들은 머리에 짐바구니를 이고 무너진 성터를 가로질러 시장으로 간다. 아직 포장도 되지 않은 흙길은 차가 지나갈 때마다 먼지를 뿜어낸다. 그 속을 지나는 누구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는다. 아라칸 제국이 버마에게 복속되기 오래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다만 그들에게 주어진 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이른 아침, 도시는 자욱한 구름으로 뒤덮인다. 집집마다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드는 연기들이 만든 구름이다. 태양빛이 연기를 밀어내고 나지막한 집들의 창을 찾아들 때는 이미 부지런한 사람들은 일터로 나간 다음이다. 하얀 셔츠의 교복을 입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학교 담을 넘어온다. 천 년 전 어느 날에도 므락 우의 아침은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건기의 낮은 강물을 여행자들을 태운 보트가 거슬러 오른다. 라카인 주의 북쪽은 친(Chin) 주. 일반 여행자들은 방문이 금지된 곳이다. 친 족의 몇몇 부족이 가까운 라카인 땅에도 산다. 친 족 여성들은 얼굴의 문신으로 유명하다. 부족간 전쟁에서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였다고도 하고 문신이 아름다움의 표시였다고도 한다. 여행자들은 강을 따라 친 족 부락을 방문하고 그들은 물레로 짠 직물을 여행자들에게 판다. 이제는 젊은 친 족 여성들은 얼굴 문신을 하지 않는다. 친 족 노파들은 자신들을 보러 몇 시간 강을 거슬러 온 여행자들과 얘기를 나누는 게 싫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작은 부락에는 아이들, 강아지들, 병아리들과 새끼 돼지들이 한데 어울려 뛰어다닌다. 얼굴도 옷도 깨끗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도시의 아이들한테는 없는 솔직한 표정과 웃음이 이 작은 부락 아이들에게는 있다. 어쩌면, 미얀마에서도 외진 이 곳까지 굳이 오게 된 까닭은 낯선 이들을 피하지 않고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이 아이들의 웃음일지 모른다. 



미얀마를 찾는 많은 여행자들이 양곤, 바간, 만달레이 정도를 둘러보고 떠난다. 하지만 미얀마 서쪽 끝에는 ‘아라칸’이라는 이름으로 벵골의 동쪽을 지배하던 옛 제국의 땅에 여전히 그때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오래된 불탑 사이로 해가 뜨고 벵골 바다로 해가 지는 곳에서 무심한 듯 삶을 이어가는 라카인의 사람들의 웃음이 가끔 생각난다. 또 한 번, 겨울이 지나간다.



2018년 2월, 어느 회사 사보에 실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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