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목포를 걷다
영화 ‘1987’이 화제가 되면서 ‘연희네 슈퍼’가 함께 떴다. 사람들의 발길이 늘자 목포시는 최근 서산동에 있는 연희네 슈퍼를 관광지로 개발하고 홍보에 나섰다. 8,90년대의 소품들도 채워놓고 SNS용 기념사진을 찍어주기도 한다. 87년의 서울 변두리 슈퍼의 촬영을 왜 목포까지 가서 했을까. 이 동네, 목포 서산동과 온금동 주변이 30년도 더 된 옛날의 모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목포는 항구다. 개항한 지 120년이 넘은 항구. 일제강점기에는 영산강을 따라 내려온 양곡과 바다의 해산물들을 일본으로 실어냈다. 갯벌을 메워 넓힌 땅에 조선인과 일본인들이 모여들어 어느 도시보다 번영했던 도시다. 경제도 문화도 남부럽지 않았다. 하지만 해방 이후, 군사정권의 산업화 정책에서 철저히 소외되면서 역설적으로 목포의 원도심은 거의 그대로 남았다. 19세기에 새로 만들어진 길과 집들은 유달산과 오거리, 역과 항구를 중심으로 21세기에도 목포에 있다.
근대 문화역사 거리에는 일본영사관, 동양척식 주식회사, 일본 사찰, 은행, 학교, 정원 등 백 년도 훨씬 전에 지어져 아직 남아있는 건물들이 많다. 하지만 목포 원도심이 매력적인 이유는 이런 문화재들만이 아니라 거리를 걸으면서 무심히 지나치는 집들 중에도 역사를 살아낸 건물들이 많다는 것이다. 옛 일본인 거주지의 작은 음식점에 들어가 보면 안으로 긴 일본식 나가야(長屋) 건물이고 마당이 좋은 카페는 전형적인 일본 정원이다. 널찍한 일본인 지역이 아닌 유달산 기슭의 옛 조선인 거주지에선 어깨보다 좀 넓은 좁고 가파른 계단 골목을 만나게 된다. 막다른 골목들과 예상과 다르게 이어지는 골목들 사이를 헤매다 보면 어느 순간 목포가 다 내려다 보이는 유달산 기슭 위에 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 목포 원도심에선 한나절 정도는 지도를 접고 옛날을 걸어볼 일이다.
그중에서도 온금동(다순구미)과 서산동은 유달산 중턱부터 바다로 이어지는, 언덕과 골목이 만든 거대한 미로 동네다. 서산동 시화마을 골목 벽엔 동네를 소재로 한 시들이 적혀있다. 백여 년 전 고향을 떠나 신도시 목포로 흘러 들어온 사람들의 삶은 지금도 이 작은 골목들을 따라 이어진다. 언덕에선 멀리 다시 생긴 신도시의 고층아파트의 불빛들도 보인다. 마을 앞 바닷길로 섬을 오가는 여객선들이 무시로 다닌다. 맞은 편의 기다란 섬은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을 준비하던 섬, 고하도다. 목포의 석양은 이 섬과 연결되는 목포대교 너머로 진다. 아마 고하도에서 보이는 유달산 기슭 다순구미의 저녁 불빛은 산에 내려앉은 작은 별들처럼 보일 것이다.
‘게(개)미지다’라는 전라도 말은 음식 속의 특유의 맛을 일컫는다.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원래 목포에는 세발낙지, 홍어삼합, 민어회, 꽃게무침, 갈치조림의 5 미가 있었다. 거기에 병어회, 준치 무침, 아구탕, 우럭지리를 더해 요즘은 9 미라고 부른다. 모두 바다에서 온 음식들이다. 아홉 음식을 한 번씩이라도 맛보려면 하루 이틀은 짧다. 거기다 일상에서 만나는 게미진 음식들도 목포에는 있다.
여름엔 콩물, 겨울은 동지팥죽이다. 하지만 목포에선 일 년 내내 콩물과 팥죽을 판다. 수십 년 역사의 콩물집과 팥죽 전문 식당들이 여럿이다. ‘중깐’이라는 애매한 메뉴가 있는 중국집들이 있다. 중화면과는 다른, 아주 가느다란 면발에 다진 재료를 넣은 자장소스가 나온다. 계란 프라이도 함께. ‘쑥꿀레’는 쑥을 넣은 찹쌀경단을 조청과 함께 먹는 음식이다. 비주얼도 맛도 낯설다. 목포의 이름난 해장국에는 고기가 붙은 뼈만 들어있다. 우거지도 감자도 없다. 동태나 생태가 들어간 청국장도 있다. 여학교 앞 분식집에는 쫄면과 라면이 함께 떡볶이 양념에 나오는 ‘쫄라’가 있고 못났다는 뜻의 ‘미추리’라는 오백 원짜리 튀김빵은 매일 박스로 팔려나간다. 60년이 넘은 제과점의 대표 메뉴 새우 바게트는 일찍 가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이른 아침 선창가 식당에선 조기나 장어, 홍어애를 넣은 탕을 낸다. 콩나물을 넣은 복국 역시.
목포 여행은 어쩌면 먹고 싶은 음식들을 줄 세워 놓고 그 사이에 주변의 볼거리를 다니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굳이 검색해서 유명한 집을 찾을 필요도 없다. 한 바퀴 훠이 돌아보고 나면, 이 게미진 음식들은 어느 한 명의 손 끝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목포라는 애틋하고 질긴 도시의 깊은 어딘가에서 오는 거란 걸 알 수 있다. 혹 간판의 빛이 바래고 무뚝뚝한 표정의 주인이 퉁명스러워 보이는 집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낮은 천장 낡은 탁자에 앉아 음식을 받아 한 입 맛보고 나면, 한 마디 하는 거다. 오매~ 겁나 게미진 것.
2018년 3월, 어느 회사 사보에 실었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