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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mo Kang Mar 08. 2019

수로에 눈물처럼 봄비 내리니
술잔 데우며 그대를 그리네

중국 절강(저장 浙江) 성 소흥(샤오싱 紹興)

상해에서 고속철도로 한 시간 반. 사월 어느 오후 절강성 소흥의 하늘은 나른했다. 역을 출발한 셔틀버스는 다른 어느 중국의 도시들과 다를 것 없는 네모난 건물들을 지나치다 어느 모퉁이에 멈췄다. 스마트폰의 지도는 저 안쪽 길 어딘가에 백 년 고택 숙소가 있다고 했지만 내가 기대하던 낭만 고도 샤오싱, 소흥이 정말 이 콘크리트 건물들 뒤에 남아 있기는 한 것일까 조금 걱정스러웠다. 그 모퉁이를 따라 작은 골목으로 걸어 들어가기 전까지는. 방금 전까지 머릿속에 그리던 그 풍경이 그대로, 거기에 있었다. 



소흥은 술이다. 중국술은 역시 백주(白酒)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소흥주의 명성은 모른 체할 수 없다. 황갈색을 띠는 중국 황주(黃酒)를 대표하는 술이다. 백주에 귀주성의 마오타이가 있다면 황주에는 절강성 소흥주가 있다. 40도를 쉽게 넘는 백주와 달리 황주는 20도를 넘지 않는 곡물 발효주다. 적어도 5년 이상, 보통 10년에서 20년 정도 숙성시켜 마신다. 와인처럼 주점 마다 다양한 소흥주 리스트를 갖추고 있어서 ‘고월룡산 古月龍山 12년 1근’ 식으로 주문하면 주점 한쪽에 줄지어 놓인 오래된 단지에서 국자로 술을 퍼내어 주석으로 만든 주전자에 담아 데워 나온다. 잔에 따라 입으로 가져가면 부드럽고 짙은 향이 혀를 지나 목으로 넘어간다. 회향두(茴香豆) 하나를 입에 넣고 맛을 보고 있으니 매간육, 삼선해물이 나온다. 모두 소흥을 대표하는 특산음식들이다. 이번엔 ‘여아홍 女兒紅 15년’을 추가로 주문한다. 조금 더 달큰하고 깊은 맛. 옛날에 여자아이를 낳으면 황주를 담아 땅에 묻어 두었다가 혼사를 치를 때 함께 보낸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했다.   



소흥은 사람이고 이야기다. 고사 ‘와신상담(臥薪嘗膽)’, ‘토사구팽(兎死狗烹)’, ‘서시(西施)의 미인계’가 이천오백 년 전 소흥을 배경으로 한다. 춘추시대 월나라와 오나라의 이야기다. 소흥에서 벼슬을 했던 서성(書聖) 왕희지의 글씨가 남아 있고, 왕수인이 성리학을 비판하며 주창한 양명학(陽明学)의 발상지가 되었다. 혁명의 시대 문화운동의 대부 채원배와 여성 혁명가 추근이 소흥 사람이고, 주(周)씨 가문에서 혁명의 시기 ‘문화혁명의 주장’ 주수인(노신)과 ‘영원한 총리’ 주은래가 소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들의 자취만 둘러보는 데도 이틀이 부족하다.  



강남 수향은 봄이어야 한다. 살랑이는 봄바람도 좋지만 흐려진 하늘에서 눈물처럼 조용히 내리는 비를 기다리는 것도 좋다. 주점 앞 비 내리는 수로를 따라 검은 오봉선(乌篷船)이 느리게 지나간다. 둥근 지붕 아래 이미 기분 좋게 취한 손님의 넋두리를 늙은 사공은 옅은 미소로 넘긴다. 저녁, 빗소리가 커지기 시작하면 석교 건너 취두부 노인도 장사를 접고 술주전자를 데운다. 언제나 그랬다는 듯 바로 옆 낡은 의자엔 선한 얼굴의 친구가 말없이 술잔을 건넨다. 오늘 이들을 위해 허연 항아리에서 십 수년을 잠들어 있던 소흥주가 깨어난다. 수로변 주점마다 붉은 등이 켜지면 소흥의 밤거리는 순간 월나라가 되었다가 또 송나라가 되었다를 반복한다. 그 뒤로 함형주점에서 술을 구걸하다 쫓겨나는 공을기가 보인다. 노신의 소설에서 그는 결국 마지막 외상을 갚지 못한다. 혁명의 불꽃은 이미 진 지 오래지만, 노신고리(魯迅古里)는 여전히 수학여행 오는 학생들과 성지답사를 하는 노인들로 붐빈다.



새벽, 백 년이 넘었다는 낡은 사합원 숙소 이층의 작은 방에서 잠이 깬다. 소흥주는 깨끗한 술이니 많이 마셔도 괜찮다던 주점 주인의 목소리가 생각난다. 외로운 여행자에게 낯선 도시의 술자리는 어쩌면 친구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종종 두고 온 사람을 그립게 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오늘이 그런 날인가 보다. 작은 창문을 열고 비가 그친 새벽하늘 잔월을 보면서, 작은 소흥주 술 한 병 손에 들고 그대에게 돌아갈 마음을 품어도 본다. 새벽꿈처럼 흩어져 버릴 봄, 너무 늦기 전에.



2018년 4월, 어느 회사의 사보에 실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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