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상황에서도 관점을 바꾸면 삶이 바뀐다는 빅터 프랭클의 통찰은 인류가 오랜 세월 돌려 말해 온 진리다. 문제는 정작 그 관점의 전환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인간이란 존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질문에 대한 실마리가 서서히 드러난다.
우리는 종종 스스로의 위상과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과장하거나 왜곡한다. 때로는 상대가 나를 하찮게 보지 못하도록 성난 표정을 짓고, 필요하면 지나친 굴종이나 아첨도 마다하지 않는다. 마음속 모호한 불안, 즉 ‘내가 밀리면 끝장날지 모른다’는 감각이 우리를 몰아붙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내로남불 현상도 특정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특이한 결함이 아니라, 대부분의 인간에게서 보이는 보편적 자기 보호 장치일 뿐이다. 단지 우리는 그것을 남에게서는 쉽게 볼 수 있지만,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할 때가 많을 뿐이다.
타인 역시 같은 원리로 움직인다. 그들 또한 자기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이리저리 감정을 조율하고 표정을 꾸미며, 때로는 나를 과도하게 비난하거나 평가절하한다. 반대로 내가 그들의 이익에 도움이 되면, 나를 높게 평가한다. 결국 우리의 인간관계는 실제의 나와 너가 아니라, 서로가 만들어낸 가공된 이미지들 사이에서 전개된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또 하나의 가상 인물을 만들어내고, 그 인물의 명예와 안정, 이익을 지키기 위해 애쓴다. 그 과정에서 진심은 뒤로 밀리고, 억측과 방어로 짜인 가짜 얼굴들이 전면에 나선다.
이처럼 가면을 쓴 이미지들끼리 부딪히는 현실에서 진정한 사랑, 깊은 신뢰, 순수한 우정 같은 소중한 경험이 실제 삶보다 문학이나 영화 속에서 더 자주 등장하는 것도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칼 융이 말했듯 인간은 상황마다 서로 다른 수많은 페르소나를 착용하며 살아간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나조차 내 본래의 얼굴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국가 간 전쟁조차 경제적 이익보다 명예를 지키기 위해 일어난다고 주장한 것도 이 맥락의 연장선상에 있다. 개인이든 국가이든, 존재의 허상에 대한 집착은 때로 실제의 삶을 압도해 버린다.
그렇다면 관점을 바꾸기 위한 첫걸음은 무엇일까. 우선 우리는 인간 세계가 허상과 이미지의 상호 방어로 인해 뒤틀려 있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인정해야 한다. 나 또한 그 허상에 사로잡혀 살아왔고, 타인도 역시 내 생각보다 훨씬 불안하고, 훨씬 흔들리며, 나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를 지키려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 깨달음은 타인의 말이나 행동에서 불쾌함을 느끼는 순간을 크게 줄여 준다. 그들의 반응은 진짜 그 사람의 반응이 아니라, 오랫동안 단련된 보호막의 자동 작동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다음에는 나부터 벗어나야 한다. 완벽한 나라는 허상을 내려놓고, 약간 부족하고, 때로는 고집스럽고, 때로는 어리석지만, 가끔은 따뜻한 마음을 내어주는 인간으로서의 진짜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논쟁에서 이기려는 집착, 억지 설득, 감정 없는 언어 대신, 내면의 진실한 정조에서 흘러나오는 말과 행동으로 스스로를 재구성해야 한다. 인간의 판단과 비판 본능을 완전히 끊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것을 유보하거나 보류하는 연습은 가능하다. 그 유보의 순간에 진짜 나와 진짜 타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스스로를 안다고 믿는 방식 자체가 환영일 수 있다. 우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거울에 비친 얼굴 모습과 타인의 평가를 통해 자신을 추측해왔을 뿐, 존재의 심층을 직접 본 적이 없다. 뇌과학이 말하듯 우리의 자아란 교육, 경험, 기억이 만든 신경망의 패턴일 뿐이며, 육체와 정신은 거대한 화학적, 물리적 과정의 결과물이다. 심층으로 내려가면 결국 비어 있는 구조, 즉 양파 껍질을 모두 벗기면 도달하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공허가 맞닥뜨려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바로 그 공허야말로 우리의 진짜 모습일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우리가 잠시 머무는 이 지구에서 스스로를 과장하거나 불안하게 지키려는 행위가 과연 그렇게 중요한가. 타인의 평가에 분노할 이유가 있을까. 나와 타인은 모두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분투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개미 같은 존재일 뿐이다. 서로가 거창한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떠돌이 같은 운명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타인을 ‘그것’이 아니라 ‘너’로 대할 수 있게 된다. 마르틴 부버가 말한 ‘나–너’의 관계는 이런 순간에만 가능하다. 타인을 도구나 위협으로 보는 ‘나–그것’의 시선으로는 결국 나 자신마저 도구로 전락한다. 나를 알고 싶다면, 타인을 먼저 ‘너’로 불러야 한다.
결국 우리가 평생 동안 마주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하나다. 나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가면을 벗고, 내면의 목소리에 솔직해지는 것이다. 타인을 판단하거나 비난하는 즉각적 충동을 잠시 멈추고, 서로가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연습을 지속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실한 인간으로 조금씩 회복된다.
그때쯤이면, 프랭클이 말한 관점의 전환은 억지 노력이나 자기 계발의 기술이 아니라, 자연히 발생하는 삶의 자세가 된다. 허상의 방어를 중단하고 진짜 ‘나’와 ‘너’를 만나는 순간, 세상은 더 이상 위상 경쟁의 장이 아니라, 잠시 함께 머무는 존재들이 서로를 비추는 조용한 공간으로 바뀐다. 그리고 그 변화 속에서 우리는 조금 더 자유롭게, 그리고 조금 더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