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일은 대본을 보내고 나서야 생각했다.
'조금 갑작스러웠을까. 부담이었을까.'
하지만 이미 보낸 메시지였다. 다시 무언가를 덧붙일까 하다가, 몇 글자 적었다 지웠다.
천천히 읽어보셔도 돼요.
부담 없이 보셔도 괜찮아요.
이렇게 보내면 괜히 변명처럼 느껴졌다. 설명하는 순간 더 부담이 될 것 같았다.
결국 아무 말도 보내지 못한 채 휴대폰을 뒤집어 두었다.
태일은 휴대폰을 보지 않으려 뒤집어 두었지만 계속 휴대폰의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메시지 밑에 작은 글씨로 '읽음'이 표시되어 있었다.
'분명 이 메시지를 읽었는데 왜 답장이 없지.'
태일은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별거 아닐 수도 있었다. 지금 당장 답할 상황이 아닐 수도 있었고, 읽고 나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걸 수도 있었다.
태일은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이상하게 마음은 쉽게 따라주지 않았다.
다시 휴대폰을 들어 괜히 메시지를 다시 열어보았다. 짧은 문장이었다. 설명도 없고, 덧붙인 말도 없었다.
대본 파일 하나와 '읽어봐 주실 수 있을까요?'라는 간단한 문장.
조금 더 편하게 말할 걸 그랬나. 괜히 존댓말이 멀게 느껴지지는 않았을까.
휴대폰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했다. 여전히 조용했다.
태일은 화면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눈은 감았지만, 잠은 쉽사리 오지 않았다.
읽어줄까? 읽고 나면 뭐라고 말할까?
대답을 기다리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마음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답장이 없는 밤은 생각보다 길었다.
조용한 새벽 시간, 나는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먼저 확인했다. 그 사람에겐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기다린 것도 아닌데, 기다린 사람처럼.
컴퓨터를 열고 그 사람이 준 대본을 열어보았다. 스무 페이지.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이었다.
표지에는 "ooo 배우님,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귀여운 병아리 그림이 있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대본 표지에 병아리를 그려 넣는 사람이라니.
컴퓨터로 읽을까 하다가, 왠지 종이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린트 버튼을 눌렀다. 프린트가 천천히 종이를 뺃어냈다. 따뜻한 종이를 손에 들고 한 장씩 정리했다. 아직 읽지 않은 문장들이 봄을 기다리는 꽃봉오리처럼, 조용히 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책상에 앉아 첫 페이지를 넘겼다. 언어유희로 시작되는 그의 대본. 처음 그를 봤을 때 느꼈던 인상과 닮아 있었다. 솔직하고, 짧은 문장 사이에 다른 의미가 숨어 있는 사람.
나는 잠시 읽는 것을 멈췄다.
다시 시선을 내려 대사를 읽었다. 웃음으로 시작했지만, 조금 뒤에는 설명되지 않은 침묵이 따라왔다.
나는 포스트잇을 하나 붙였다.
'이 장면 좋다.'
왜 좋은지 바로 적히지는 않았다. 대사가 아니라 그 사이에 남아 있는 여백 때문인 것 같았다.이지를 넘길수록 문장보다 사람이 먼저 떠올랐다.
대본을 쓴 사람의 목소리, 말을 고르던 순간의 표정, 잠깐 멈췄던 시선.
나는 괜히 웃었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새벽 공기 속에서 작게 울렸다. 읽고 있는 건 대본이었지만, 이상하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다시 포스트잇을 붙였다.
여기는 왜 이렇게 썼을까.
질문을 적어놓고 나서야 알았다. 지금 나는 대본을 읽고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읽고 있는 중이라는 걸.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창밖이 조금 밝아져 있었다. 나는 대본 위에 손을 올려두었다.
읽고 나면 무언가 남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조용했다. 대사가 아니라 그 사이에 있던 여백들이 오래 머물렀다. 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메시지 창을 열어놓고 한동안 아무 말도 적지 못했다.
'잘 읽었습니다.'
짧게 적었다가 지웠다. 너무 성의 없어 보일 것 같았다.
다시 적었다.
대본 잘 읽었어요.
좋았어요.
한참 바라보다가 결국 한 줄만 남겼다.
얼마 뒤, 태일에게서 답장이 왔다.
전태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떠셨어요?
짧은 문장이었다.
나는 잠시 화면을 바라봤다. 대본에 대해 할 말은 많았는데, 이상하게 문장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람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는 천천히 답장을 적었다.
나
자세한 피드백은 만나서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언제까지 지방 공연을 하세요?
전송버튼을 누르고 나니 후회와 함께 괜히 심장이 조금 빨라졌다. 피드백을 하겠다는 말이었지만, 사실은 다른 이유가 더 컸기 때문이다.
전태일
다음 주까지 지방에 있어요.
주말에는 서울에 올라가는데....
문장이 이어지지 않았다.
나
그럼 이번 주 금요일에 제가 무진으로 갈게요. 그때 같이 저녁 먹으면서 얘기해요.
전태일
좋아요. 그날 공연이 9시쯤 끝나니, 그때 만나서 같이 밥 먹으면서 얘기해요.
나는 웃는 이모티콘 하나를 보내곤 화면을 한참 바라봤다.
약속 하나가 생겼을 뿐인데 아침 공기가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대본을 펼쳤다. 이번에는 문장을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곧 만나게 될 사람을 떠올리기 위해서였다.
약속한 식당은 공연장 근처 작은 식당이었다. 공연이 9시에 끝난다는 말에 나는 8시 50분쯤 그 식당에 도착했다. 그때 태일에게서 문자가 왔다.
전태일
지금 막 공연이 끝났어요. 여기 정리만 하고 바로 식당으로 갈게요.
나
전 지금 막 식당에 도착했어요. 정리하시고 천천히 오세요.
십 분쯤 지나 문이 열렸고, 전태일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나는 메뉴판을 펼쳐 놓은 채 괜히 한 장씩 넘기며 천천히 살펴보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태일은 약간 숨이 찬 듯 물었다.
"아니에요. 저도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익숙한 말이었지만, 둘 다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 웃었다.
주문을 하고 나서야 대화가 이어졌다.
나는 가방에서 대본을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몇 장의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태일의 시선은 그 포스트잇에 머물렀다.
"많이 붙었네요. 제 대본 별로였나요?"
태일은 웃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좋았던 부분을 붙여 놓은 거예요. 그리고.... 궁금한 부분도 있어서요."
나는 괜히 말을 흐리며 태일의 시선을 피했다.
음식이 나오기 전 우리는 대본에 대해 얘기했다.
"이 장면 좋았어요. 태일 배우님의 세계관이 보이는 느낌이었어요."
"태일배우님이요?
태일이는 웃으며 말했다.
"저는 그 말이 좀 어색하더라고요. 같이 일하는 스텝들도 그냥 형이나 오빠라고 부르라고 해요."
나는 잠깐 웃었다.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전 88년생이에요."
"아, 88년이라... 저는 87년생이에요. 제가 한 살 많으니 오빠네요."
태일이 멋쩍게 웃었다.
나는 잠깐 생각하다 말했다.
"그럼 제가 어떻게 부르는 게 좋을까요?"
"편하게 부르셔도 돼요 오빠라고 불러도 괜찮고요."
"네. 좀 더 친해지면 그럴게요."
음식이 나왔고, 대화는 잠시 멈췄다.
태일이 물컵을 내 쪽으로 조금 밀어두었다. 그리고 내 앞에 있는 앞접시에 음식을 덜어주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손을 잠깐 바라봤다. 그 작은 움직임이 괜히 오래 남았다.
대본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길어졌다. 태일은 말보다 듣는 시간이 더 많았고, 정아는 평소보다 말이 조금 길어졌다.
“여기는 왜 이렇게 썼어요?”
정아의 질문에 태일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사실 별생각 없이 쓴 내용이에요. 제 대본은 딱히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에요. 평범한 이야기, 그냥 배우들과 함께 즐기고 싶은 이야기를 쓰려고 하고 있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태일과 닮아 있다고 느꼈다.
"그게 태일 씨답네요."
말을 하고 나서야 호칭이 자연스럽게 바뀌어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괜히 웃었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느려졌고 우리는 괜히 남은 물만 마셨다.
식당 안이 조금 조용해져 있었다. 나는 대본을 가방에 넣었다.
“가실까요?”
태일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식당을 나왔을 때 밤공기가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공연장이 있던 골목을 지나 기차역 방향으로 걸었다.
처음에는 나란히 걷는 게 어색해 서로 반 발짝씩 거리를 두고 걸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보폭이 자연스럽게 맞춰졌다. 말은 많지 않았지만 걸음 소리만으로도 어색하지 않았다.
횡단보도 앞에 멈췄을 때 태일이 무심하게 내 쪽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초록불이 켜지고 길을 건너려는 순간 태일의 손이 내 팔꿈치 근처에서 잠깐 멈췄다.
붙잡지는 않았지만, 붙잡으려다 멈춘 것 같은 거리였다.
나는 모른 척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그 순간이 이상하게 또렷하게 남았다.
조금 더 걸었을 때 태일이 가볍게 물었다.
“춥지 않으세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태일은 내 걸음에 맞춰 속도를 조금 늦췄다. 그 작은 배려가 괜히 마음에 오래 머물렀다.
“오늘 같이 대본에 대해 얘기할 수 있어서 재미있었어요. 조심히 가세요.
“저도 너무 좋았어요. 다음에 공연을 하게 되면 알려주세요. 꼭 보러 갈게요.”
그렇게 우리 둘은 기차역 플랫폼에서 헤어졌다.
집으로 가는 길, 나는 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식당에서의 대화가 천천히 떠올랐다. 그냥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전태일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
저도 좋았어요.
잠시 후 메시지가 다시 왔다.
전태일
근데…
이제 반말해도 될까요?
정아는 화면을 바라봤다. 횡단보도 앞에서 나란히 서 있던 순간이 떠올랐다.
팔이 스칠 듯 말 듯한 거리였는데, 그게 괜히 오래 남아 있었다.
나
네. 그전에 저의 호칭부터 바꿔야겠네요.
태일 오빠
곧 답장이 왔다.
전태일
오빠라고 했으니 이제부터 반말로 얘기하는 거다
나
알겠어. 오늘 너무 즐거웠어. 내일 공연도 마무리 잘하고 서울 올라가.
전태일
어. 고마워. 집에 도착하면 문자 줘.
나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괜히 웃었다.
그날 밤, 우리는 같은 계절에 있었고, 온도는 조금 가까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