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나는 책이 든 가방을 몇 번이나 내려다봤다.
공연을 보러 가는 건지, 사람을 보러 가는 건지 아직 정확히 구분할 수 없었다.
가방 안에는 읽다 만 책과 작은 노트, 그리고 그에게 선물할 책과 꽃이 들어 있었다.
그날의 목적은 분명 공연이었지만, 마음은 자꾸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가을의 풍경이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울긋불긋한 단풍과 이미 떨어져 바닥에 뒹굴고 있는 낙엽들. 나무들 사이로 햇빛이 번지고, 이름 모를 역들이 조용히 지나갔다.
기차의 흔들림에 맞춰 가방 속 꽃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나는 계속 가방을 열어 책과 꽃을 확인했다가 다시 조용히 닫았다.
기차가 터널 안으로 들어가자 창밖이 잠시 어두워졌다.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날 무진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나는 공연을 보러 가고 있으면서도, 어쩌면 어떤 이야기가 시작되는 자리로 향하고 있다는 예감 속에 앉아 있었다.
공연장은 생각보다 작았다. 골목 끝에 조용히 놓여 있는 상자 같은 공간.
화려하진 않았지만, 무언가 오래된 이야기가 스며 있는 듯한 곳이었다.
입장은 공연 시작 30분 전부터 가능하다고 했다.
딱히 갈 곳도 없던 나는 공연장 앞을 서성이다가 로비 한쪽 소파에 앉았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 펼쳤지만, 문장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페이지를 넘기는 손만 움직이고 마음은 계속 공연장 문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철컥—
공연장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밖으로 나왔다.
“어? 정아님, 안녕하세요.”
나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낯선 공간에서 내 이름이 불렸다는 사실만으로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저 전태일입니다. 이미 와 계셨네요.”
그 순간에서야 나는 그 사람이 전태일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무대 위에서 보던 얼굴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조명도, 음악도, 박수도 없는 자리에서 그는 조금 더 조용하고 조금 더 평범해 보였다.
“공연 재미있게 봐주세요. 열심히 준비하긴 했는데.”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연 끝나고 좀 있다 봬요.”
공연이 끝났을 때, 객석의 박수는 오래 이어졌다.
무대 위에 서 있던 전태일은 마지막 인사를 하며 고개를 숙였고, 그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 늦게 따라오는 것을 느꼈다.
막이 내린 뒤에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이야기의 여운 때문인지, 아니면 무대 위에서 본 그 사람과 조금 전 로비에서 만난 사람이 겹쳐 보였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극장을 나서려는데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전태일
정아님, 저 여기 정리만 하고 나갈게요. 공연장 앞에서 잠시 기다려 주세요. 시간 괜찮으시면 저녁 같이 하실래요?
나는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네’라고 답했다.
우리는 식당을 가기 전 극장 근처를 잠시 걸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고, 서두르지도 않았다.
그는 오늘 어땠냐고 물었고, 나는 좋았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보다 분위기를 먼저 이해하는 사람 같았다.
식당은 공연장 근처의 작은 밥집이었다. 늦은 시간이라 손님이 많지 않았고 테이블 위 작은 조명은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공연 자주 보시나 봐요”
전태일이 나에게 물었다.
“네. 예전에는 뮤지컬 음악감독이 되는 게 꿈이어서 대학 때는 거의 매주 대학로에 가서 연극이랑 뮤지컬을 봤죠. 그런데 몇 년 동안은 아이를 키우느라 못 보다가... 이제야 조금 여유가 생겨 다시 공연을 보러 다니고 있어요.”
“..... 결혼하셨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싱글맘이에요. 혼자서 아이를 키우고 있어요. 가끔은 엄마 도움을 받으면서요.”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놀라지도 위로하지도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받아들였다. 그게 오히려 편안했다.
우리는 다시 공연 이야기를 이어갔다. 장면 하나, 대사하나, 무대 위에서 느껴진 감정 같은 것들. 하지만 대화는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일상으로 흘러갔다.
“아, 그런데 공연 전에 저인 줄 어떻게 아셨어요?”
“인스타 스토리에서요. 가끔 피아노 치는 영상 올리시잖아요. 그래서 알았어요.”
그 말을 듣고 나는 순간 멈칫했다.
피아노 치는 영상은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았을 텐데 그걸 알아봤다는 게 조금 신기했다.
눈썰미가 좋은 사람인가, 아니면 생각보다 오래 나를 보고 있었던 걸까.
전태일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조용히 물었다.
“정아 씨는.... 연애할 생각 있으세요?”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나는 숟가락을 잠시 내려놓고 그의 눈을 쳐다봤다.
그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고, 그 눈빛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감정이 시작되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연애요?”
작게 웃으며 되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냥… 궁금해서요.”
질문은 가볍게 던져졌지만, 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다가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저는 아이가 있어요.”
그의 표정이 아주 조금 달라졌다. 놀람이라기보다는, 더 집중해서 듣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연애는… 생각도 못 하고 있어요. 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닌데, 그냥… 여러 가지가 복잡하더라고요.
아이도 있고, 제 마음도 그렇고.”
말을 하다 보니 설명이라기보다 변명처럼 느껴졌다.
나는 괜히 물 잔을 만지작거렸다.
“어려운 문제죠.”
전태일이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사람 마음이란 게…”
그가 말을 고르다 덧붙였다.
“생각처럼만 흘러가진 않잖아요.”
잠깐의 침묵이 테이블 위에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말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그 침묵 속에서 조용히 자리를 찾는 느낌이었다.
기차 시간은 아직 조금 남아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역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식당을 나와 역으로 향해 천천히 걸었다. 밤공기가 서늘했지만 대화의 온도는 낮아지지 않았다.
공연 이야기, 무대 뒤의 이야기,
역이 가까워질 무렵, 나는 괜히 가방 끈을 한 번 더 고쳐 잡았다. 전해줘야 할 것이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마음을 건드렸다.
“아, 저…”
내가 말을 꺼내자 그가 걸음을 조금 늦췄다. 나는 가방을 열어 책을 먼저 꺼냈다. 그리고 그 위에 조심스럽게 놓여 있던 작은 꽃을 함께 건넸다.
“이거… 선물이에요.”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손에 들린 것을 바라봤다.
“책은… 전에 추천해 달라고 하셔서요. 공연 보고 나서 계속 생각나서 골라봤어요.”
나는 괜히 말을 덧붙였다. 설명이 필요 없는 선물인데도, 설명하지 않으면 어색할 것 같았다.
“꽃은… 직접 뜬 거예요. 생화는 금방 시들 것 같아서.”
말을 하고 나니 조금 부끄러워졌다. 손으로 만든 것을 건넨다는 건 생각보다 더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전태일은 책을 받아 들고, 꽃을 손끝으로 살짝 만졌다. 그 표정이 잠시 멈춘 것처럼 보였다.
“이거… 직접 만드신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웃었다. 크게 웃지는 않았지만, 어떤 마음을 고스란히 받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감사합니다. 책도, 꽃도… 잘 간직할게요.”
그 말은 가볍지 않았다. 선물보다, 그 마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괜히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 순간 역 입구가 보였고, 헤어질 시간이 생각보다 빨리 다가왔다는 걸 알았다.
"오늘 공연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나는 그의 말을 뒤로한 채 기차에 올라탔다.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전태일.
아, 그리고 제가 쓴 희곡이 하나 있는데요. 시간 되면 한 번 읽어봐 주실 수 있을까요?
파일 하나가 함께 도착해 있었다.
나는 바로 열어보지 않았다.
그가 무대 밖에서 건네는 말 같아서.
읽어도 될지, 읽으면 안 될지 그 경계가 아직은 애매했다.
집에 도착한 뒤에도 한동안 가방을 내려놓지 못했다.
익숙한 공간인데도 마음만은 아직 무진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조용히 컴퓨터를 켰다.
마우스를 움직여 파일 위에 커서를 올려두고 잠시 망설였다.
이제는 읽게 될 것 같았다.
희곡도, 그리고 이 사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