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30분.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이 떠졌다. 집안은 아직 밤의 온도를 품고 있었다. 부엌 시계 초침 소리만 또박또박 움직였다. 아이의 방문을 살짝 열어본다. 아이는 아직 새근새근 잘 자고 있다. 싱글맘 10년 차. 아이는 많이 크긴 했지만 여전히 나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다.
이 시간은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오롯이 나의 시간이다. 누군가를 돌보기 전에, 나를 정리하는 시간. 하루를 시작하기 전, 잠깐 숨을 고르는 시간. 일어나자마자 커피를 내리고, 책을 펴고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하는 그런 시간.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핸드폰을 먼저 집어 들었다.
알람 1건
화면을 켜자마자 인스타그램 알림이 하나 떠 있다.
심장이 조금 먼저 반응했다. 손가락이 생각보다 빨리 움직였다.
전태일
인스타 게시물을 보니 책을 많이 읽으시던데...
혹시 저에게 추천해 줄 만한 책이 있나요?
문장은 짧았다. 이모티콘도, 인사도 없었다. 무대 위에서 봤던 그의 이미지와 너무 닮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화면을 끄지 못한 채 같은 문장을 세 번째 다시 읽었다.
'저에게'
그의 조심스러운 말투가 좋았다.
부엌으로 가 커피를 내리면서 어떤 책을 추천해줘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다. 너무 가벼운 책은 그의 손에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고, 너무 무거운 책은 그의 하루를 짓누를 것 같다. 그의 하루 한 모서리에 조용히 놓일 수 있는 책. 난 그런 책을 추천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책은 쉽게 골라지지 않았다. 나는 한참을 책장 앞에서 서성거렸다.
전태일
어? 이 시간에 일어나 있네요?
나는 잠시 멈췄다. 이 말이 안부인지, 놀람인지... 그저 흘러나온 문장인지 가늠해 보면서.
나
이 시간이 조금 익숙해요.
설명은 덧붙이지 않았다.
그는 더 묻지 않았고, 나는 더 말하지 않았다. 새벽은 말이 길게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다. 서로의 사정을 다 알지 못해도. 묻지 않아도 되는 시간.
나는 다시 책장 앞에 섰다. 아직 답하지 않은 질문 하나를 손에 쥔 채로.
전태일
저 새로운 작품 들어가거든요. 그래서 지금 대본 보고 있어요.
나는 그 문장을 천천히 읽었다.
'새로운 작품'
대본을 넘기며 밑줄을 긋고 혼자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무대 조명 아래 서 있던 얼굴도.
나
축하드려요. 새로운 작품이라니. 설레겠어요.
전태일
늘 새로운 작품을 설레죠.
이번 공연은 지방에서 하는 거라서 초대해 드리고 싶은데 힘들 것 같네요.
'초대해 드리고 싶은데'
나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봤다. 초대하고 싶은 마음과, 이미 선을 긋는 듯한 거리.
나
지방 어디서 하는데요?
보내고 나서야 내가 정말 묻고 싶었던 게 장소인지 아닌지 알 것 같았다. 어디라도 상관없었다. 그의 무대를 한 번 더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창밖이 조금 밝아지고 있었다. 커피는 이미 식었고, 나는 아직도 책을 고르지 못했다.
전태일
무진이요.
나는 컴퓨터로 지도를 검색했다. 기차 노선, 소요 시간, 막차 시간.
나
전 세림에 살아요. 무진이랑 세림이랑은 기차로 15분, 차로 가면 40분 정도 걸려요.
보내고 나서야 내가 괜히 구체적으로 말했나 싶어 손가락을 잠시 멈췄다. 하지만 이미 전송된 문장은 되돌리수 없었다.
잠시 후,
전태일
세림 알죠. 제가 원래 무진에서 태어났거든요.
어렸을 때 가끔 친구들이랑 기차 타고 놀러 가던 곳인데.
그럼 제 공연 보러 오실래요?
이번에는 계산하지 않았다.
나
좋아요. 그럼 그때 책도 추천해 드릴게요.
보내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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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이모지 하나. 설명 없는 마침표 같았다.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지 못한 채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았다.
창밖이 완전히 밝아 있었다. 아이 방문 안에서는 뒤척이는 소리가 들린다. 하루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어쩐지 내 하루는 이미 다른 방향으로 조금 기울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