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나는 창밖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아니 보지 않으려고 했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무대의 빛이 아직 꺼지지 않아 창밖 풍경은 좀처럼 초점을 찾지 못했다.
잠시 고개를 들어 유리창을 보았을 때, 그 안에 비친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눈빛에는 생기가 돌았고 입가에는 이류를 알 수 없는 느슨한 긴장이 남아 있었다. 마치 마음이 먼저 반응해 버린 사람처럼.
가방 안에서 구겨진 프로그램 북이 손에 닿았다. 나는 다시 꺼내 배우들의 이름을 훑었다.
주연, 조연, 앙상블.
그리고
알베르트 역 : 전태일
나는 그 이름을 한 번 더, 이번에는 더 느리게 읽었다. 글자들이 무대의 조명에서 벗어나 종이 위로 가라앉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름도, 사진 속 얼굴도 생각보다 평범했다. 그래서인지 더 현실 같았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무대 밖에서의 그는 어떤 얼굴로 하루를 살아갈까.’
집에 도착해 신발을 벗고 불을 켜는 순간에도 그 생각은 좀처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고 침대에 몸을 눕혔을 때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결국 휴대폰을 들었다.
검색창의 그의 이름을 입력했다. 계정은 공개였고, 팔로워 수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그의 계정은 배우의 계정처럼 보이지 않았다. 화려한 프로필 사진도 없었고, 작품 목록을 정리해 둔 하이라이트도 없었다.
대신 책으로 도배된 게시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배우의 계정이라기보다 마치 북큐레이터의 계정을 들어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책 표지들, 그리고 짧은 문장으로 그 책을 설명하는 그의 캡션들.
책을 설명한다기보다, 읽은 시간을 조심스럽게 기록해 둔 것 같은 문장들이었다.
그 사이에 조심스럽게 섞여 있는 몇 개의 게시물만이 그가 배우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공연 포스터, 무대 위의 얼굴, 태그 된 극장 이름.
그제야 이 계정이 무대 위의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는 게 조금 실감이 났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책을 좋아한다는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나는 이 배우와 연결되고 싶어졌다.
나는 공연 리뷰를 쓰기 시작했다. 사실 오늘은 공연은 조금 더 혼자 간직하고 싶었다. 말로 옮기는 순간, 이 밤의 감정이 너무 빨리 정리될 것 같아서. 하지만 그와 연결되고 싶다는 욕망만큼은 끝내 감출 수 없었다..
알베리트 역 : #전태일배우 @J. tail_actor
그를 태그 하여 게시물을 올렸다.
몇 초 뒤, DM이 도착했다.
전태일 :
오늘 공연 보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짧고 조심스러운 문장이었다. 홍보용 인사처럼 보이지도, 그렇다고 과하게 다가오지도 않았다. 나는 답장을 쓰다 지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리다 결국 이렇게 보냈다.
박정아(나)
좋은 공연이었어요.
특히 후반부 장면이 오래 남네요.
답장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전태일
그렇게 봐주셔서 정말 다행이네요.
공연은 자주 보시나요?
그 질문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는 잠깐 멈췄다.
관객에게 묻는 질문 같기도 했고, 개인에게 묻는 질문 같기도 했다.
박정아(나)
공연 보는 거 좋아하는 편이에요.
오늘 공연은.... 좀 특별했어요.
잠시 후, 점 세 개가 떴다 사라졌다.
이대로 연락이 멈출 것만 같았다. 나는 괜히 휴대폰을 더 세게 지었다가 급하게 다시 메시지를 하나 더 보냈다.
박정아(나)
책 좋아하시나 봐요.
저도 책 읽는 거 좋아하는데...
이번엔 조금 더 오래 기다려야 했다. 핸드폰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집어 들었다.
점 세 개가 다시 나타났다.
전태일
네.
공연 없는 날에는 거의 책만 읽어요.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 쓸데없는 덧붙임은 없었다. 더 묻지 말라는 기색도, 먼저 다가오려는 서두름도 없었다. 나는 잠시 화면을 바라봤다. 이 문장은 끝이 아니라 다음 말을 기다리는 쪽으로 조심스럽게 기울어져 있었다. 그래서였다. 내가 다시 말을 꺼낼 수 있었던 건.
박정아(나)
어떤 책을 좋아하세요?
나는 그와의 대화를 끝나고 싶지 않았다.
어떤 책을 좋아하냐는 말은 너무나도 추상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 말을 건네야 대화가 조금 더 이어질 것 같았다.
전태일
그냥 소설책을 주로 읽어요.
읽었던 소설책을 다시 읽기도 하는데, 그 익숙함이 저는 좋더라고요
‘다시’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새로운 것보다 이미 알고 있는 걸 기꺼이 다시 꺼내 보는 사람 같아서.
박정아(나)
저는 읽었던 책은 다시 못 읽겠던데.
재독을 한다니 조금 부럽네요.
점 세 개가 한 번 더 떴다가 이번에는 오래 머물렀다.
전태일
익숙해지는 게 꼭 나쁜 건 아니더라고요.
그날의 대화는 거기서 멈춰 있었다.
하지만 끝난 느낌은 아니었다.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예전에 읽었던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몇 장을 넘겼지만,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마지막 문장이 자꾸 떠올랐다.
익숙해지는 게 꼭 나쁜 건 아니더라고요.
그때의 나는 아직 몰랐다.
이 사람과의 대화가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어떤 마음들이 조용히 자리를 잡게 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