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다 똥 된 나의 휴가여
올해 초, 16일의 자유를 얻었다. 2019년 한 해 성실히 근무한 직장인의 의무를 다해 얻은 권리, ‘휴가’다. 물론 내가 친구들만큼 제 때 취업을 하고, 첫 번째 직장을 홧김에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20일쯤의 자유를 얻었을 것이다. 어쨌든 직장인에게 휴가는 눈치 보며 쓰지만 눈치 없는 존재가 되고, 치열한 눈치싸움에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알토란 같은 존재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나 역시 매년 1월이면 새로 나눠 준 탁상용 달력을 뒤적거리며 휴가 계획을 세운다. 내 경우엔 보통 1년에 한 번 계획하는 해외여행에 내가 가진 휴가의 절반 또는 3분의 2를 배분해놓는다. 12시간쯤 비행기를 타고 기내식 두 번에 간식까지 주는 장거리 여행이라면 한 열흘 정도, 숨 막히는 습도와 냉방의 최전선이 공존하는 동남아 여행은 약 일주일 정도를 할애한다.
그리고 남은 휴가는 대형 프로젝트나 2박 이상의 출장을 비롯한 연속되는 격무의 보상심리로 활용한다. 또 페스티벌이나 콘서트를 다녀온 후 다음날 다리가 도무지 움직이지 않을 때 사용하기도 한다. 대개 이런 날에는 점심때쯤 일어나 느지막이 서점과 카페에 간다. 일에 시달려 하지 못한 개인의 사유를 채우는 날이다. 이때 나는 굳이 광화문 교보문고와 카페에 가는데, 그 이유는 수많은 직장인 사이에서 휴가자의 여유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사들고 광화문 광장을 지나 사거리 횡단보도를 건너 큰 유리창이 있는 폴바셋에 자리를 잡는다. 1시가 되면 부랴부랴 사무실로 돌아가는 직장인들을 보며 물리적 망중한을 즐기는 셈이다. 그리고도 남은 하루 이틀의 휴가는 급히 처리할 은행 업무가 생기거나, 갑자기 몸에 탈이 나서 병원을 가는 날, 엄마가 김장을 하는 겨울 문턱의 어느 날에 사용한다.
올해도 내 휴가 계획은 창대했다. 열흘은 엄마의 환갑 기념 유럽여행에 배정해 알뜰살뜰 자유를 즐기고 있었다. 코로나 창궐 초기에도 곧 사그라지겠다며, 우리가 가을에 여행을 계획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며 웃었다. 그러나 코로나가 하반기까지 이어지며 7월 무렵 비행기표를 취소했을 때, 갑자기 휴가 부자가 됐다. 2주에 한 번씩 휴가를 써도 남는 숫자를 보며, 혼자 주 4일 근무 제도를 도입해 선진적으로 살아볼까 고민도 했다. 그래도 겨울이면 코로나는 과거의 이야기가 되겠지 싶어 초가을에 국내 여행에 이틀의 휴가를 사용했다. 서점에서 책 사고 카페 가는데 남은 휴가를 다 사용하기는 정말 싫었다. 그렇게 다섯 개의 휴가가 남았다.
그리고 다음 주, 난 강제 휴가에 들어간다. 남은 잔여 휴가를 모두 소진해야 하니까. 사람은 정말 간사한지라 이제는 휴가를 내고 카페에서 커피라도 마시고 싶다. 살뜰히 계획하고 아껴서 사용한 소중한 휴가. 아끼다 똥 된 16일의 자유여.
계획은 창대했지만, 그 끝은 너무나 소박한 나의 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