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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원 Oct 02. 2022

지금 가지고 계신 그 자신감, 넣어두세요.

하루 한 번씩 잡는 남자의 발목

수영장엔 규칙이 많다. 그 규칙은 당연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당연한 것은 정말 당연하다. 입수 전에 반드시 샤워를 해야 하는 것과 수모를 착용해야 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수영장 등록 기간이 갱신되는 매월 초, 이미 집에서부터 수영복을 입고 오신 분들을 왕왕 볼 수 있는데, 이들은 주로 초급반 회원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케이스는 대개 이틀 정도면 자가 교정이 된다. K-눈치를 장착한 보통의 회원들은 다른 사람들이 탈의를 하고 샤워 후에 수영복을 입는다는 것을 금세 깨닫는다. 그래서 당연한 룰은 정말 당연하게 지켜진다.


당연하지는 않지만 암묵적으로 지켜야 하는 룰은 주로 물속에 있다. 다른 회원의 평영 발차기에 맞더라도 불쾌해하지 않는 것이나, 턴을 하는 사람을 위해 휴식은 레인 모서리에서 하는 것들이다. 공식적으로 규정된 것은 아니지만 ‘물속’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여 서로 하는 배려들이다. 그리고 강습 때마다 묘한 신경전을 불러일으키는 아주 중요한 룰이 하나 있다. 바로 ‘순서’다.


준비체조를 하고 물속에 들어가 각자 자리를 잡는다. 수영장 저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보통 한 반의 강습생은 15명 안팎이니 1번에서부터 15번까지, 각자 고유 번호를 부여받는다. 그리고 이 고유 번호는 체력 순으로 결정된다. 가장 체력이 좋은 사람이 1번이 되어 2번을 이끌고, 다시 2번이 3번을 이끄는 셈이다. 이렇게 체력 순으로 수영을 하면, 회원 간의 간격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다. 처음 수영을 시작하는 초급반 회원분들은 모두 체력이 비슷하니 순서가 매번 바뀌기도 하지만 중급반 이상이 되면 스스로 본인의 체력을 파악하게 된다. 그래서 매일 비슷한 순서로 자리를 잡고 수영을 한다.


나는 요즘 3번에 선다. 잠영을 아주 잘하고 체력도 좋으신 남성 회원이 우리 반 부동의 1번, 영법마다 자세가 멋진 여성 회원이 2번에 선다. 그리고 나. 상급반에 올라온 지 약 4개월 만에 이른바 ‘선두 그룹’에 서게 됐다. 처음 상급반에 올라와 15번에 섰을 때는 14번 회원님을 쫓기 바빴으나, 조금씩 체력이 좋아져서, 그리고 앞에 계시던 분들이 연수반으로 진급하며 3번에 섰다. 그러나 매월 초, 새로운 회원분들이 진급할 때마다 평화로운 수영 생활에 금이 가곤 한다.

여느 날처럼 체조 후 입수하여 웜업을 시작하려는데, 어느 남성 회원이 내 앞에 자리 잡았다. 그저 내가 낯을 익히지 못한 회원이겠거니 생각했으나 오산이었다. 그분은 내 앞에서 출발했으나 정확히 25미터 만에 체력이 급감한, 이제 막 상급반에 올라오신 회원이었다. 누군가는 내가 얼마 잘하지도 못하는 수영 실력으로 텃세를 부린다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회원분이 웜업 반 바퀴만에 체력이 떨어지는 바람에 4번이 된 나도, 내 뒤에 5번 회원도, 그리고 15번 회원도 모두 제 속도를 내지 못했다.


사실 이런 경험은 처음이 아니다. 중급반에 있을 때도 초급반에서 막 올라온 20대 남성 회원은 굳이 1번 자리를 지키고 섰다. 본인은 이제 막 중급반에 왔지만, 그래도 여자인 나보다는 빠를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1번에 선 것이다. 이런 일을 처음 겪었을 때는 강사님이 순서를 조정해주시기만을 기다렸다. 내가 앞으로 내질러 갈 수도, 또 뒤로 가시라고 말하는 것도 어쩐지 텃세 같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내 페이스대로 수영을 한다. 그렇게 앞사람의 발목을 두어 번 낚아채면, 그들은 본인의 체력을 깨닫는다. 자신감이 한껏 과잉된 회원의 발목 잡아채기를 벌써 1년, 이제 내 뒤에 남성 회원분들이 적어도 5명 이상은 된다.


수영은 성별을 나눠서 하는 종목이지만 동네 수영장에서 성별은 무의미하다. 온전히 체력 순으로 서는 것이 운영의 묘다. 하지만 왜 유독 본인의 체력을 과신하는 회원분들은 꼭 남성일까. 같이 진급한 여성회원은 맨 뒤에 서서 본인의 체력을 가늠한다. 그렇게 체력을 어느 정도 확인한 뒤 적절한 순서를 찾는다. 기존에 상급반에 있었던 회원일지라도 나보다 더 좋은 체력을 가지고 있다면 보통은 앞자리를 내어준다. 규정된 것은 아니지만 물속에서 지켜야 하는 암묵적인 룰이다.


물론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수력을 다진 지 3년 차, 본인의 체력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암묵적인 룰을 어기고 앞 순서를 맡는 사람들의 절대다수는 남성이었다. 그리고 수영을 취미로 하고 있다는 내 앞에서 과잉된 자신감을 보이는 것도 대개 남성이었다. 남사친 중 한 명은 본인도 곧 수영을 시작할 것이며, 6개월 안에 나를 따라잡겠다고 공표하기도 했다. 내가 얼마나 많은 남성 회원의 발목을 낚아챘는지도 모르고 던진 그 자신감에 웃음이 삐져나왔다.


전부는 아닌 일부의 남성회원분들께 전한다.

지금 여성회원 앞에서 발휘되는 과한 자신감은 넣어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본인의 체력부터 가늠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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