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까짓 야구가 뭐라고
가을이 끝나간다. 단풍이 낙엽으로 부서지는 광경과 코 끝에 스치는 겨울 냄새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저녁의 취미, 야구의 시즌이 저물고 있다. 물론 우리 팀의 시즌은 10월 중순에 이미 끝났다. 9월 말에 끝나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싶지만, 야구팬들의 마음은 언제나처럼 간사하다. 정규시즌 144게임 동안 이렇게 할 바에는 해체나 했으면 싶고, 밥 먹고 야구만 하는 선수들이 야구를 못 하니 걱정스럽기도 하다. 그래도 우리 팀이 가을에 야구를 해서 두툼한 옷을 입고 야구장에 가고 싶은, 한 게임만 또다시 한 게임만 더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바로 간사한 야구팬이다.
어쩌다 야구에 빠졌느냐 묻는다면 정말 할 말이 없다. 우리 집은 늘 야구 중계가 틀어져 있었고 온 가족이 야구장에 가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집이었다. 타이거즈의 엄청난 빅팬인 엄마와 아빠는 나와 언니를 잠실에서 사직까지, 8개 구장(당시는 8개 구단)에 모두 데리고 다녔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의 식사에서는 야구가 빠지지 않았다. 타이거즈가 잘하면 밥상 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그렇지 않으면 방구석 전문가들이 총출동해 부진의 이유를 분석했다. 야구는 우리 가족을 관통하는 주제다. 그렇게 나도 야구를 좋아하는 어른이 되어, 지방 출장이 잡히면 KTX보다도 우리 팀의 야구 일정부터 확인하곤 한다.
야구를 좋아하는 취향을 드러낼 때, 종종 헛웃음이 나는 질문을 받는다. 아마도 여성 야구팬이라면 모두 받아봤을 그 질문, “너 그럼 보크가 뭔지 알아?”다. 혹은 런다운이 무엇인지 묻는 사람들도 있는데, 어떤 질문이든지 간에 목적은 하나다. 감히 여자인 네가 야구를 정확히 알고 보는지 평가하고 싶어 나오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을 처음 받을 땐 내가 야구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증명하려 줄줄이 답을 설명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질문에도 굳은살이 박였다. “보크나 런다운은 이미 너무 유명하니까 나중엔 스트라이크 낫아웃 정도는 물어봐”라며 웃고 넘어간다.
야구 용어 테스트를 통과하면 다음은 ‘얼빠’ 취급을 견뎌야 한다. 내가 가장 억울하게 생각하는 부분인데, 야구를 좋아하는 여성분들 중 선수의 얼굴을 보고 좋아하는 사람은 정말 0에 수렴할 것이다. 잘생긴 사람을 좋아한다면 야구는 결코 흥미로운 분야가 될 수 없다. KBO 리그를 탈탈 털어봐도 배구 선수처럼 키가 크고 몸이 호리호리한 선수는 없다. 정말 없다. 그리고 애초에 잘생긴 얼굴이 좋다면 연예인을 좋아할 가능성이 크지 않은가. 그래서 난 여성을 ‘얼빠’ 취급하는 분위기가 몹시 불편하다.
불편한 것은 몇 가지 더 있다. 야구장 안에서 여성 팬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얼마 전, 평범한 파울을 보고 깜짝 놀란 여성 야구팬을 가리키며 “여성분들은 일단 배트에 맞으면 환호하지만 파울이었습니다.”라고 말한 캐스터가 있다. 그러나 야구장에 한 번이라도 가 본 사람이라면 모두 알 거다. 타석에서 타격음이 발생하면 장내의 모든 관중은 움찔하기 마련이다. 심지어 더그아웃에 있는 선수들마저도 타격음에 놀라 몸을 일으켰다가 실망하는 영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선수들도 공이 배트에 맞으면 일단 환호하고 보는 ‘야알못’인지 그 캐스터에게 묻고 싶다.
이 외에도 야구팬이라면 경기장 내 여성 관중을 집요하게 비추는 방송사가 어떤 곳인지, 치어리더의 의상이 유독 불편할 정도로 짧고 붙는 구단이 어떤 구단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여성 야구팬이 존재하는 이유는 야구 선수가 잘생겨서가 아니라(정말 아니다), 남자 친구가 야구를 좋아해서도 아니다. 여성도 넓은 그라운드를 보면 속이 뻥 뚫리고,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공을 보며 명품 투수전을 즐길 수 있고, 빠른 발로 베이스를 훔치는 도루를 보면 짜릿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가을과 함께 저물어 가는 야구 시즌을 보며, 남성 팬들만 아쉬운 것은 아닐 테다. 프로야구 관중 50%에 육박하는 여성 팬들도 야구 없는 계절을 견디기에 똑같이 아쉬움을 느낄 것이다. 내년에는 여성을 조금 더 순수한 야구팬으로 바라보기를 바라며 야구 없는 계절, 겨울을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