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표의 독서 일기
노르웨이의 숲 - 무라카미 하루키, 일본, 모음사, 2019년 12월 11일 ~ 12월 15일
이 책을 처음 읽은 건 중학생 때였다. 우리 나라에 갓 몰아닥친 하루키 열풍에 편승하고자 아무 것도 모르는 풋내기 소년이 든 이 책은 선정적이었다. 비디오 대여점 한 구석에 있어서 자꾸 기웃거리던 빨간 딱지의 비디오 테이프 마냥 하루키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눈에 안 들어오고 선정적인 묘사에만 자꾸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왜 이 작품이 이렇게 세계적인 작품이지? .
그 다음 이 책을 손에 쥔 건 대학생 때였다. 집에 있던 노란 색 표지의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와 같다는 걸 알고 뒤늦은 충격에 빠져 허겁지겁 책을 폈다. 나오코와 와타나베의 슬픈 사랑과 미도리와 와타나베의 썸(?)이 너무나 몰입력이 있어서 감탄하며 읽었다. 하지만 그 외에 나머지 부분은 이해되지 않는 것 투성이였다. 레이코와 와타나베의 섹스는 그 중 압도적이었다. 심지어 몰입력이 있었던 나오코와 와타나베, 그리고 와타나베와 나오코의 대화에서도 고구마 다섯 개를 물 없이 흡입한 느낌을 받았다. 역시 생각했다. 왜 이 작품이 이렇게 세계적인 작품이지?
그리고 근 10년 만에 다시 이 책을 읽었다. 역시 노란 색 표지의 노르웨이의 숲으로. 삼십 대 중반이 되어서야 이 책의 진정한 묘미를 알 것 같았다.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던 와타나베와 레이코의 섹스마저 아름답게 느껴졌다. 상실과 회복이 이렇게 잘 어우러져 그려진 작품이 또 있을까 싶다. 세상은 모두 상실로 얼룩져있지만 우리의 존재 안에는 그에 대한 회복의 유전자가 있기 때문에 이내 곧 괜찮아질 거라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상실의 시대마저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나의 순간은 상실로 점철되어있더라도, 그래서 아프더라도 그 아픔에 굴복하진 않을 것이다. 왜 이 작품이 이렇게 세계적인 작품인지 이제야 비로소 알았다. 세상은 상실의 시대이지만 20년에 걸쳐 우리 집에 있는 노란 색 표지의 노르웨이의 숲을 ‘상실’하는 일은 아마 없을 것 같다. 나에게 상실의 아픔과 회복을 알려준 책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