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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남하이 김대표 Feb 29. 2020

미디어에서 그리는 장애인 이야기에 대한 단상

장애인식개선 에세이

 슈퍼스타K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시조새격인 슈퍼스타K는 당시 파격적인 컨셉으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었고, 그 시간에 맞춰 텔레비전 앞에 앉는 게 내 주요 일과였다.


  어느 날 눈이 불편해 보이는 한 남자가 나와서 노래를 불렀고, 그는 이효리를 울린 남자로 등극하여 실시간 검색어 1위에 무려 이틀 가까이 올라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 김국환이라는 석자보다, 그가 보여준 ‘가수’로서의 놀라운 실력보다, 그가 갖고 있던 시각장애에 모든 포커스를 맞추고 있었다. 물론 이효리의 눈물 역시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던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이유로 태어났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효리의 눈물이 이효리를 울린 그 남자가 대중의 이목을 받게 만든 건 이효리의 눈물 그 자체도, 그가 갖고 있던 시각장애도, 대중들이 텔레비전을 통해 직접 전달받은 감정의 울림도 아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미디어에서 비춰지는 장애에 대한 불편한 이야기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국환이 형은 나와 장애인식개선콘서트를 다니면서 꽤 가까워졌다. 현학이와 함께 더블라인드라는 훌륭한 싱어송라이터 그룹의 멤버로 속해있는 형은 나에겐 네임드였다. 난 형을 미디어를 통해 알고 있었으니까. 형을 처음 만나고, 식사를 하면서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을 때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부터 이효리를 울린 기분이 어떤지 등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질문들을 배수진을 친 병사처럼 난사했다. 형은 웃으며 말했다. “난 이제 이효리를 울린 남자라는 말이 별로야.” 이를 통해 꽤 많은 인지도를 쌓았지만 결국 그 인지도는 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진, 동정에 기반을 둔 인지도였다는 말로 들렸다. 실제로 형이 시각장애인이 아니었으면 과연 이효리는 울었을까? 그리고 미디어는 형에게 주목했을까? 나아가 대중들은 형에게 관심을 가졌을까?


  주변에 텔레비전에 출연한 유명한 장애인들이 꽤 있다. 이창훈 아나운서를 비롯해서, 현학이도 히든싱어 김종서 편 우승자 출신이어서 왕중왕전에도 나갔고, 현학이와 국환이형과 같은 더블라인드 멤버인 명수는 강호동씨가 진행하는 KBS 스타킹에서 한국의 스티비원더로 불리며 멋진 퍼포먼스를 보여준 적이 있다. 그 외에도 주변의 여러 장애인들이 미디어를 통해서 얼굴을 비췄고, 그들이 아는 사람보다 그들을 아는 사람이 더 많은 수준까지 올라섰다. 그런데 그들을 향하는 미디어의 핀 조명은 모두 동정이라는 불빛을 내뿜고 있다. 즉 그들에게는 동정이라는 빛이 없으면 빛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동정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미디어는 그런 동정의 시각을 통해 또 다른 편견을 만들어내고 있고, 그게 바로 미디어가 장애를 대하는 태도가 불편한 점이다.


  미디어에서 장애를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두 종류가 있다. 그 두 시각은 양극단에 있지만 어쨌든 그릇된 편견을 조장할 수 있는 바람직하지 않은 시각이다. 하나는 도와줘야 하는 동정의 대상으로서 바라보는 장애인의 이야기, 또 하나는 장애를 극복한 위대한 대상으로서 바라보는 장애인의 이야기.


  오늘도 텔레비전에는 수많은 장애인들이 나온다. 무조건 불쌍하게 보이게 만드는 앵글과 편집, 배경음악으로 그들을 내가 도와줘야 살 수 있는 나약한 존재로서 바라보게 만들고, 한쪽 귀퉁이에 있는 전화번호에 ARS 전화를 걸어 단 돈 1,000원이라도 후원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미디어의 따뜻하지만 선을 긋는 시선은 요새 유행하는 책 제목처럼 우리를 ‘선량한 차별주의자’로 만든다.


  반대쪽에 서있는 장애인들에게 비춰지는 포커스는 사뭇 다르지만 미디어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다를 바 없다. 스포츠 경기에서 좋은 성과를 거둔 장애인에게, 문학 분야에서 뛰어난 작품을 만든 장애인에게, 과학계에서 두드러진 연구를 해낸 장애인에게 우리는 모두 이렇게 말한다. “장애를 극복한 사람.” 과연 그들이 스포츠 경기에서 좋은 성과를 거둬서 그들이 갖고 있는 장애가 사라졌을까? 그들이 낸 훌륭한 문학작품이 그들의 장애를 없애주는 마법의 묘약이라도 된 걸까? 그들이 발견해낸 우주의 묘한 움직임이 그들의 몸에 있는 장애를 없애주기라고 한 걸까? 그들은 장애를 극복한 적이 없다. 그들은 그들이 낸 성과와 상관없이 여전히 장애를 갖고 있다. 결국 미디어는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바라보게 만들고, 그들이 낸 성과에 관계없이 그들이 장애인이라서 그만큼 한 게 대단하다는 역시 따뜻하지만 선을 긋는 시선을 조장하고 있다.


  어쩌다보니 주변에 장애인 친구들이 꽤 있다. 그런데 그들을 바라보면 미디어에서 느낄 수 있는 동정의 대상으로서의 장애인,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들은 그 누구도 장애를 극복하지 못했고, 하지만 그 누구도 동정이 기저에 깔린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와 똑같이 종류는 다르지만 어쨌든 기술의 도움으로 예전보다 조금 더 나은 편안한 삶을 살 수 있고, 내가 팔꿈치만 내어주면 나와 세상 어디든 함께 갈 수 있다.


  창훈이와 함께 한 주간야구 왜라는 라디오 팟캐스트는 한참 잘 나갈 때 구성원이 10명이나 되었다. 그 중 7명은 장애를 갖고 있었다. 대안 미디어라고 하긴 하지만 그래도 미디어에서 바라본 그들은 모두 장애인이지만 약간의 배려와 약간의 기술과 함께라면 장애인 같지 않았다. 그냥 나와 함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대본을 쓰고, 편집을 하고, 촬영을 하고, 녹음을 하고, 퍼블리싱을 하는 방송의 모든 과정을 나눠서 하면서 처음엔 여타 미디어에서 받은 감정처럼 대단하다는 생각이 주를 이뤘지만, 그들과 함께 한 시간이 쌓이면 쌓일수록 그들은 동정이 필요한 장애인도,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도 아닌, 나와 함께 방송을 만들어가는 구성원이라는 생각이 본능처럼 각인되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장애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가장 장애에 대한 편견으로 점철된 곳이 바로 미디어라는 확신이 점점 드는 요즘이다. 대중의 시각은 많이 변화됐는데, 미디어의 장애를 다루는 문법을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며, 장애 인식을 개선해야한다고 해놓고서 실제로는 더 편향된 장애인식을 갖게 만든다. 하루에 얼마 벌지 못하며 미디어의 표현을 빌려 ‘불쌍하게’ 살아가는 장애인들에게 정말 필요한 건 그들에게 향하는 후원이나 동정의 손길이 아니라, 그들이 장애인으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인식되고 자립할 수 있게 도와주는 미디어의 바라봄일 것이다. 또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낸 장애인들에게 필요한 건 그들을 바라보며 “우와 장애를 극복한 사람이야. 대단해”라고 말하지 않고, 그들이 장애인으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그들의 성과가 인정받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미디어의 문법일 것이다.


  장애인식개선이 진짜 필요한 곳은 미디어라고 생각한다. 오늘도 그들은 선량함을 가장한 편견을 조장하고 있다. 요새는 유튜브나 팟캐스트 같은 대안 미디어가 있어서 우리가 해볼 수 있는 여지가 조금이나마 있지만 아직도 거대한 미디어 제국이 갖고 있는 힘엔 턱없이 부족하니 이젠 그들이 먼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장애를 바라보는 미디어 문법을 버리고 장애인식을 개선해야 한다.


  오늘은 KBS, 내일은 SBS, 모레는 MBC, 그리고 지방의 방송국들을 도는 나와 현학이, 창훈이의 모습이 그림이 아니라 현실이 됐으면 좋겠다. 미디어님들. 불러주십쇼. 확실히 장애인식을 개선시켜드리겠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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