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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남하이 김대표 Feb 25. 2020

선악 총량 불변의 법칙

감성 에세이

  어린 시절 시험 기간만 되면 괜히 착해졌다. 착하게 굴면 내가 공부한 것보다 성적이 더 잘 나올까 봐. 그래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쓰레기를 줍거나, 지하철에서 굽은 허리로 껌을 파는 할머니의 껌을 사거나, 행동으로 착함을 보여줄 게 없을 땐 괜히 동생에게 예쁘다고 말했다. 시험 기간뿐만이 아니었다. 뭔가 원하는 게 있을 때마다 나는 착해졌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어 고백을 앞둔 순간에도 나는 착해졌고, 반장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도 나는 착해졌고, 설날이 다가오거나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역시 착해졌다.


  선악 총량 불변의 법칙이었다. 시험을 망칠까 봐, 고백했다가 차일까봐, 반장 선거에서 떨어질까봐, 세뱃돈을 못 받을까봐, 크리스마스 선물을 못 받을까봐 걱정했던 나는 나만의 이론을 만들었다. 나에게 악한 기운을 줄 사건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 괜히 착해지는 것. 선과 악의 합이 100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착한 일을 한 만큼 나쁜 일은 덜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부정적인 결과가 발생하기 전에 선수 친답시고 착한 행동들을 하려했던 것이다.


  이 버릇은 성인이 되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대학교 때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고, 고백을 하기로 마음먹은 순간 한 일주일을 강박에 시달린 적도 있다. 그 일주일을 정말 열심히 착하게 살았던 것 같다. 비속어도 안 쓰고, 친구들에게 먹을 것도 많이 사고, 광고 전화도 친절하게 끊고, 학교 정문 앞 모금하는 사람에게도 배춧잎 한 장 드리고. 그런데 차였다. 그것도 무참하게. 그녀에게 선물한 강아지 모양 머리핀은 주인 잃은 강아지가 되어 정처 없이 왈왈 짖고만 있었다.

 

  나는 도망쳤던 거였다. 원하는 것을 위해 진심을 다해 노력하기보다는 요행을 바란 거였다. 그 노력이 힘들어서 선악 총량 불변의 법칙이라는 말도 안 되는 걸 만들었던 거였다. 시험을 잘 보고 싶었으면 열심히 공부를 했어야지 쓰레기를 줍지 말았어야 했다. 좋아하는 그 아이를 여자친구로 만들고 싶었으면 그 여자의 마음을 사기 위해 노력했어야지 지하철에서 껌을 사면 안됐다. 반장이 되려면 기대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어야지 동생에게 예쁘다고 말하는 건 소용없었다. 그랬다. 선악의 총량은 불변하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착하게 굴어도 부정적인 결과는 발생했고, 열심히 노력한 순간에는 내 모습이 어땠는지 와는 상관없이 좋은 결과가 나왔다.


  이제 더 이상 선악총량 불변의 법칙을 믿지 않는다. 뭔가 원하는 게 있을 땐 그 원하는 걸 달성하기 위해 열심히 뛰어갈 뿐이다. 그 과정에는 착함도 나쁨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발 끈 조여 매고, 물 한 모금 마신 다음 두 팔을 휘휘 내저으며 그 곳을 향해 열심히 달려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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