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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남하이 김대표 Mar 04. 2020

스티비 원더가 시각장애인이 아니었다면

장애인식개선 에세이

  대학교 4학년에 들어갔을 때 돌연 휴학을 하고 미국 여행을 떠났다. 누가 보면 굉장히 과감하고 멋있는 선택이라 하겠지만, 일종의 도피처였다. 마침 가족과 얽힌 좋은 기회로 저렴한 비용에 미국 여행을 갈 수 있었고, 어머니를 동반자로 2011년 미국 시애틀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45일간의 장기 여행 동안 주 교통수단은 렌터카였고, 지난한 운전 시간 동안 길동무는 미리 한국에서 아이팟에 담아간 수많은 음악들이었다. 특히 그 당시 푹 빠져있던 스티비 원더는 미국 어느 도시에 가든 잘 어울렸고, 가장 많이 들은 가수 순위에 스티비 원더는 레이 찰스와 함께 늘 상위권이었다. 공교롭게도 둘 다 시각장애인이고, 세계적인 거장이었다. 지금은 당연히 그들을 생각할 때 그들이 가진 시각장애는 그냥 그들이 가진 정체성에 불과하다고 자연스럽게 여기지만, 그 당시 그들에게 관심이 갔던 이유는 그들이 가진 시각장애 때문이었다. 귀가 들리지 않는데 세계적인 음악가가 된 베토벤처럼, 눈이 보이지 않는데 역시 세계적인 거장이 된 그들은 뮤지션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위인이었다.


  스티비 원더의 일화 중 가장 유명한 이야기를 꼽으라면 단연 딸인 아이샤 모리스를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눈 수술을 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거짓말이라고 한다. 실제로 스티비 원더가 만약 시력을 되찾는다면 가장 보고 싶은 게 딸의 모습이라고 할 정도로 딸에 대한 사랑이 엄청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눈 수술 이야기는 사실에 커다란 날개를 단 허구였다. 팩트는 이렇다고 한다. 1999년 존스홉킨스 대학 의료연구진이 시세포가 살아있는 사람의 각막에 마이크로칩을 이식하여 빛의 변화를 감지하고, 이를 뇌로 전달하는 기술을 개발했는데 실제로 시력을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고 빛의 감지를 통해 사물의 형상을 대강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스티비 원더가 연구진들에게 연락하여 테스트를 받아 보기로 하였다. 하지만 테스트 결과 스티비 원더의 시세포는 완전히 파괴되어 이 시술에 적합하지 않다고 결론이 났기에 그는 그냥 돌아왔다.  이런 이야기가 대중에게 감동 포인트를 주기 위해 시각장애를 가진 스티비 원더의, 딸을 한번이라도 보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포장되었던 것이다. 스티비 원더는 그냥 혹시나 해서 한 번 시도해본 게 미디어의 문법에서는 엄청난 감동 포인트처럼 꾸며져 왔다. 그리고 여전히 그의 눈 수술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실처럼 여겨지고 있다. 결국 세계적인 거장 스티비 원더도, 그리고 레이찰스도 대중들에게 그들이 보여준 음악적 역량만큼이나 변함없이 장애라는 프레임에 맞춰 해석되고, 소비되고 있다. 베토벤도 그렇지 않은가? 베토벤하면 늘 앞에 붙는 수식어는 귀가 들리지 않는 역경을 헤치고 세계 최고의 뮤지션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들도 그러한데 하물며 우리 옆에서 일상을 함께 공유하는 대부분의 무명인 장애인들에게 비춰지는 시각은 오죽할까?


  장애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다. 단순하게 뭔가를 하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는 요소를 장애라고 보기도 하고, 누군가는 신체적인 결함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결함이라는 말을 싫어하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 그렇게 표기되어 있다). 다양한 장애에 대한 정의 중에 치료에 초점을 맞추는 관점도 있다. 즉 치료를 할 수 있으면 병이고, 치료를 할 수 없으면 장애라고 보는 인식이다. 처음 창훈이에게 이 관점을 들었을 때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어서 굉장히 놀라워했던 기억이 난다. 이 논리를 받아들이고 공고화하기 위해 스스로 반박 지점을 찾아보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난 수많은 장애에 대한 정의 중 그 정의를 지배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치료의 관점에서 접근할 수 없는 장애는 병이 아니고, 장애인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이며, 장애는 치료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물론 지체장애의 경우 어느 정도 재활을 통해 좋아질 수 있기 때문에 치료가 가미되어야 한다는 의학적 관점도 존재하지만, 모든 장애를 병으로 보는 인식은 옳지 않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곳에서 장애를 병으로 간주하고 있다. 미디어에서 혹은 정치권에서 종종 나오는 수사를 보면 “장애를 앓고 있는”, “장애를 고치기 위해”라는 표현들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그릇된 시각임에 틀림없다. 장애 자체를 고칠 수 없고, 장애에서 극복될 수 없기 때문에 장애는 병이 아니다. 앓는 대상이, 고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난 장애는 정체성이라는 관점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얼마 전 더불어민주당에서 청년인재로 영입했다가 미투때문에 후보에서 자진 사퇴한 원종건씨의 배경엔 MBC의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느낌표’의 ‘눈을 떠요’라는 코너가 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시각장애와 청각장애를 동시에 가진 어머니와 함께 사는 그에게 ‘눈을 떠요’에서 진행한 어머니의 각막 이식은 인생의 터닝포인트였을 것이다. 그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눈을 떠요’에서 진행한 많은 사례에서 많은 사람들은 큰 감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큰 감동을 주는 프로그램이 오히려 장애인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심어줄 수 있는 편향된 프로그램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장애인에 대한 미디어의 소비가 지나치게 감동 쪽으로 몰고 가는 건 그게 속된 말로 시청자들에게 먹힐지는 몰라도 장애인식개선차원에서는 공고한 편향의 벽을 쌓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스티비 원더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는 본인의 음악성을 시각장애와 연결시키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스티비 원더는 시각장애인이 아니었더도 분명 세계적인 뮤지션이 되었을 것이다. 비단 스티비 원더 뿐이 아니다. 나와 함께 글을 쓰고 있는 현학이도, 내 친구 창훈이도 모두 자신들의 성과가 긍정적인 시각이든 부정적인 시각이든 그들이 갖고 있는 장애에 묻히는 걸 바라지 않을 것이다. 한 쪽의 장애가 다른 쪽의 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말의 신봉자들이 만든 논리처럼 스티비 원더의 엄청난 음악적 성과를, 현학이와 창훈이가 보여준 모습들을 그들이 갖고 있는 시각장애와 연결 짓는 건 그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언제쯤이면 장애를 ‘앓는’ 대상이 아닌, ‘고쳐야 하는’ 대상이 아닌 그냥 그들이 가진 정체성으로 바라보는 날이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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