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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남하이 김대표 Mar 07. 2020

장애인에게 바치는 참회록

장애인식개선에세이

  사실 이 글은 지금까지 내 행동과 사고에 대해 세상 모든 장애인에게 바치는 참회록이자 반성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내 삶에 대한 자경문(自警文)이다.


  국민학교(난 5학년 때부터 초등학생이었다) 1학년 때였다. 애들하고 쉬는 시간만 되면 정신없이 잡기 놀이라는 걸 하며 교실을 휘젓고 다녔다. 그 날도 난 친구들과 잡기 놀이를 하고 있었고, 술래를 피해 도망가고 있었다. 만화영화 ‘톰과 제리’속 제리처럼 술래인 톰을 놀리고 잽싸게 1분단과 2분단 사이 가방과 신발주머니가 방해하고 있는 좁은 통로를 멋지게 지나 코너를 돌던 중이었다. 바닥에 놓여있는 가방끈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나는 그 끈을 즈려밟았고, 내 몸은 이기지 못했다. 코너에서 만들어진 원심력과 구심력 사이 긴장된 평행관계가 깨져버렸고, 난 작은 체구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힘으로 2분단 끝자리 의자에 부딪히고 말았다. 턱을.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그 자리엔 피가 흥건했다. 반 아이들 모두 비명을 지르고, 깜짝 놀라 울음을 터뜨린 친구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 때 한 친구(이제 K라고 칭한다)가 갑자기 쓰러진 내 곁으로 오더니 쭈그려 앉아 바닥에 흥건한 피를 찍어 입에 가져갔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케첩 같네.” 쓰러진 나는 온 몸에 소름이 돋았었다. 이후 나뿐만 아니라 반 친구들은 K의 그 행동과 말을 기억하며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따돌림이라기보다는 회피가 어울릴 것이다. K의 기이한 행동이 무서웠던 것이다. 실제로 K는 내가 다쳤을 때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조금은 다른 행동을 보여줬다. K는 지적장애를 갖고 있었다.  


  중학교 때였다. 따돌림이 한창 사회적 이슈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전국적 문제가 됐다는 것은 이미 따돌림이 많은 공간에서 일상화가 되었다는 것이고, 우리 학교도 부끄럽지만 여타의 학교들과 다를 바 없이 ‘전따’(전교에서 따돌림 당하는 친구)와 ‘은따’(은근히 따돌림 당하는 친구)가 몇몇 있었다. 따돌림의 대상이 되는 친구들은 대개 집안이 가난하거나, 장애를 갖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주도를 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친구들의 잔다르크가 되어주진 못했다. 따돌림과 따돌리지 않음을 극단으로 나누면 오히려 따돌림 쪽에 더 몸을 틀고 서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친구들을 지칭할 때 그 친구들의 이름보다는 ‘병신’, ‘비정상’, ‘애자’와 같은 혐오의 언어로 지칭했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그 친구는 약간의 자폐를 갖고 있었다.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철없는 우리에게는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차별과 혐오의 경계만이 존재했고, 우리랑 다른 모습을 보여준 그 친구는 종종 우리의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중학교 때 만큼 철이 없진 않아서 따돌림을 시키진 않았지만... 아니 모르겠다. 그 친구는 자신이 따돌림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나를 포함한 반의 대부분 아이들은 그 친구를 자신들과는 다른 존재로 판단했고, 우리를 그 친구와 비교하며 곧 있으면 대학생이 되는 장밋빛 청춘에 장애가 방해하지 않아 다행이라는 역겨운 생각을 하기도 했다.  


  돌아보니 매 교육과정마다 심하던 심하지 않던 간에 장애를 가진 친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친구들을 대하는 내 감정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조금씩 변화했다. 물론 모두가 장애인식개선과는 거리가 먼, 부정적 스펙트럼 어딘가로의 변화였다. 초등학교 때는 무서움의 감정이 컸다.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친구들과 다른 행동을 하고, 담임선생님이 조금 더 신경을 쓰는 친구. 다름에서 오는 감정은 다름 아닌 무서움이었다. 중학교 때는 철저하게 나빴다. 앞장섰건 뒤에 섰건 간에 난 어쨌든 전교의 대부분 아이들과 함께 그 줄에 서있었다. 질풍노도의 시기, 중2병 등 그 시기를 옹호하는 단어들로도 옹호할 수 없는 행위였다. 고등학교 때는 국민학교 때만큼 무섭지는 않았고, 중학교 때만큼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그 친구와 나 사이의 다름이 가져다주는 차이가 가져다주는 감정은 잘못된 표현이지만 당시의 감정을 그대로 살려 말하면 정상임에 다행이라는 안도감이었다. 장애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했던 내 학창시절 내내 내가 가진 장애에 대한 생각을 한 단어로 정리하면 비정상이었다. 나는 정상, 장애를 가진 친구들은 비정상. 장애에 있어서만큼은 지극히 오만하고, 편협했으며, 부끄럽기 그지없는 학창시절이었다.


  그런 청소년기를 지났으니 성인이 되어서도 사실 장애인을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대학교에 입학해서는 장애를 가진 친구가 없었고, 자연스레 장애에 대한 관심은 실험실 유리조각 사이에 놓인 나뭇잎 색처럼 옅어져 갔다. 약간의 변화라면 장애가 놀림의 대상에서 동정의 대상으로 바뀐 정도? 하지만 그 역시 교과서적 관점이었고, 그마저 여전히 난 정상이고 그들은 비정상이니 내가 도와줘야한다는 시혜적 관점이었다.


  하지만 장애에 대한 모든 인식은 다른 글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그를 만나고 나서 완전히 달라졌다. 이창훈 아나운서. 그를 알게 되고, 그의 지인들과 친분을 갖게 되면서 장애를 구분 짓는 단어에서 정상과 비정상은 혐오의 표현이며, 비장애인들이 만들어낸 악의적 경계 설정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긍정적 스펙트럼 쪽으로의 변화. 창훈이를 알게 되고 만나게 된 모든 장애인들은 장애를 갖고 있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평범하고 보통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이석원 작가의 책 제목처럼 보통의 존재였던 것이다. 돌아보면 참 웃기고 소름마저 돋는다. 인간을 구분 짓는 잣대에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가 있다니. 그렇게 히틀러와 나치, 일제강점기의 일본이 보여준 행동들은 비난하면서 정작 우리는 장애인들에게 그런 행동들의 시발점인 우열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우린 그저 80억 개의 조금 다른 별일 뿐 모두 평범하지만 각자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별인데 말이다.


  정상과 비정상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정상과 비정상의 잣대가 장애에 놓이면 안 된다. 예쁜 사람은 정상, 못생긴 사람은 비정상, 키 큰 사람은 정상, 키 작은 사람은 비정상, 돈 많은 사람은 정상, 돈 없는 사람은 비정상이라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 또 절대 다수는 정상 절대 소수는 비정상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마찬가지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단순하게 그 사람이 장애를 갖고 있고, 갖고 있지 않고를 가르는 선이 아니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도덕적인 판단의 범주에 속한 것이며, 선과 악의 스펙트럼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존재 자체로는 도덕적인 판단과 선악의 스펙트럼에서 벗어나 있는, 모두가 평범하며 아름다운 존재이다.


  서두에 밝힌 것처럼 이 글은 지금까지 내 행동과 사고에 대해 세상 모든 장애인에게 바치는 참회록이자 반성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내 삶에 대한 자경문이다. 하지만 장애를 비정상으로 생각했던 모든 사람들 역시 이 글을 통해 참회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앞으로 장애의 프레임에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경계가 생기지 않길 바란다. 우린 그런 하찮은 경계로 나뉠 존재가 아니라 모두 반짝반짝 빛나는 존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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