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훈남하이 김대표 Mar 17. 2020

19년만에 이사 가는 날

감성 에세이

  아침부터 분주했다. 우리가 부른 낯선 사람들이 벨을 누르고 문이 열리자 우르르 들어왔다. “신발 신고 들어갈게요.” 그 말은 상상에서 현실로 세상을 바꾼 기폭제 역할을 했다. 4개월 전 계획한 순간이 조금씩 잠입해 어느 순간 앞에 떡하니 나타났다. 19년만의 이사. 나의 고등학교 시절부터 30대 중반까지의 삶이 온전히 녹아있는 이 곳을 떠나는 날이다.


  이 아파트로 이사 오던 날. 고등학교 1학년. 다음 날이 학교 음악 피아노 수행평가 날이었다. 먼저 놓인 피아노로 사다리차를 타고 쉴 새 없이 올라오는 이삿짐들과 분주한 아저씨들의 몸놀림을 지휘 삼아 수행평가 연습곡인 조성모의 가시나무를 연주했다. 1분이나 쳤을까, 한 아저씨가 소리를 지르며 시끄러우니 그만하라고 했다. 주눅 든 나는 목도리 같은 빨간 천을 건반 위에 깔고 피아노 덮개를 닫았다. 부모님은 그 장면을 보지 못하셨던 것 같다. 이삿짐이 다 들어찬 방에 혼자 서서 떨리고 화나는 마음을 가라앉혔던 기억이 이 집에서의 첫 마음의 요동이었다.


  다세대 주택의 2층에서만 살던 나에게 8층이라는 높이가 선사하는 감동은 어마했다. 이사가 끝나고 자장면을 배달시켜 기다리는 설레는 시간에 8층에서 내려다보는 아파트의 주차장은 가득 들어선 차들의 개수만큼이나 점점이 마음 속 감동의 별이 되었다. 심지어 저 멀리 보이는 관악산의 자태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첫 날의 강렬했던 두 기억을 시작으로 이 집에 살면서 수많은 감정이 내 세포 하나하나를 구성했다. 인생의 절반이 넘는 시간을 이 집과 함께 했으니 이미 내 몸의 모든 세포가 이 집에 적응했을 터. 성적표를 숨겼다가 아버지께 들켜서 야구 방망이로 소위 빠따를 맞았던 날의 아픔, 컴퓨터 모니터에서 친구와 함께 떨리는 손으로 클릭한 끝에 맞이한 연세대학교 최종 합격 글자, 그리고 어머니께 올렸던 눈물의 큰 절, 아파트 주차장을 몇 바퀴를 돌며 통화하던 날들, 아파트 한 쪽에 있던 공원에서 친구들과 밤새 찼던 공, 군 입대 후 처음 외출을 나와 방문했던 낯선 집, 아파트 앞 지하차도 공사의 시끄러운 소음, 순간은 몰랐지만 돌아보니 언제 건물이 올라왔나 싶게 변해버린 주변, 역까지 걸어가며 들었던 노래와 벚꽃, 욕조가 있는 화장실이라 취미가 되었던 반신욕, 처음 차를 만난 비오는 날의 설렘, 새벽 업무를 마치고 들어가다가 주차장에서 어이없게 사고를 내고 헛웃음을 터뜨렸던 순간, 인생의 절반을 넘게 살았던 이 곳을 떠나는 날 그 모든 감정의 세포가 요동친다. 그래서일까 19년 만에 이사 가는 오늘 아침은 만감이 교차했다. 아니, 사실 며칠 전부터.


  이삿날을 일주일 정도 남기고 나서부터 부모님은 조금씩 짐 정리를 시작하셨다. 집을 가득 채웠던, 마치 원래 이사 올 때부터 있었던 것 같아서 박제된 느낌마저 들었던 짐들이 하나 둘 상자 속으로 자리를 찾고, 그 공간이 여백으로 남을 때 마다 내 몸의 세포가 하나 둘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조금씩 발 디딜 틈이 사라져가는 거실과 대조적으로 비어가는 장들과 방들을 볼 때 마음 한 편이 괜히 울렁거렸다. 이사에 대한 경험이 많이 없어서일까 거의 처음 느껴보는 이런 감정에 어쩔 줄 몰랐던 며칠이었다.


  동네를 뜨진 않는다. 사실 옆 아파트로 이사 간다. 지금의 이런 감정도 이사 갈 아파트의 인테리어가 다 끝나고 입주를 시작하면 며칠 만에, 아니 몇 시간 만에 희미해질 수도 있다. 이사 갈 집은 12층이라 더 좋은 전망을 보면 이 집에 지금 느끼는 감정은 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감정과는 다르게 이 집에 대한 기억만은 영원할 것이다.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산 103동 801호. 새 주인을 만나 내가 이 집에서 느꼈던 좋은 감정들만큼 행복한 느낌들을 그들에게 많이 선물했으면 좋겠다.  


---------------------------------------------------------------------------------------------------------------------------

김대표와 소통하시려면...

김대표의 인스타그램 - hunnamhi 

김대표의 유튜브 채널 - https://www.youtube.com/channel/UC--D3GmKHrl62GeY0t1ke9A?view_as=subscriber


작가의 이전글 장애인에게 바치는 참회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