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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남하이 김대표 Apr 03. 2020

말의 중요성을 아시나요?

초보 대표의 좌충우돌 사업 이야기 - 2월 6일 목요일

  하루 중 가장 많이 연락하는 사람들을 꼽아보면 단연 Y가 포함된다. 절친이자 회사 직원인 Y. 그만큼 서로 의지도 많이 하지만 부딪힐 일도 많다. 그리고 그 한판 승부는 하루에도 몇 차례 펼쳐지곤 한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다.


  워낙 친한 사이이기 때문에 서로에게 막 대하는 경향이 있다. 거기에 성격은 서로 반대이다. 나는 외향적에 바로바로 터놓고 이야기하는 스타일, Y는 내향적에 속에 담아두는 스타일. 전쟁이 발발할 수밖에 없는 다양한 원인들이 곳곳에 산적해있고, 둘 중에 하나가 예민한 날이면 이곳저곳 폭탄이 날라 다닌다.


  오후에 한 번 터졌다. 이유는 Y의 보고하지 않는 습관 때문. 회사의 기본은 구성원들이 돌아가는 일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늘 보고를 강조했고, Y는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는 습관이 아직 길들여져 있지 않았다. 많이 이야기했지만 여전히 고쳐지지 않는 Y의 보고 습관. 한바탕 화를 내고, 마음을 가라앉혀 다시 이야기를 했다. 자기 잘못이라는 걸 아는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Y. 가까스로 봉합했다.


  그런데 오늘은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바로 그 날이었다. 하루에도 몇 차례 전쟁이 펼쳐지는 날. 밤이었다. 외부 일정을 끝내고 밤에 들어가는 길. 오늘까지 제출해야하는 신청서가 있었다. 한 지자체 문화재단에서 진행하는 문화사업이었다. 첫 번째, 머리를 맞대어 사업에 들어갈 내용을 정리하고, 두 번째, 글에 강점이 있는 내가 초안을 쓴 뒤, 세 번째, 문서 작성 및 디자인에 강점이 있는 Y가 파일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꼼꼼함에 강점이 있는 내가 다시 검토를 해서 최종파일을 보내는 방식으로 주로 일을 한다. 나름 합리적인 방식이고 둘 다 만족해하는 작업 스타일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Y가 마지막 단계를 건너뛰고 제출을 해버린 것이 아닌가?


  전화로 극 대노했다. Y도 밤늦게까지 작업하느라 예민해져있는지 맞불작전이었다. 강대강으로 부딪힌 둘. 이건 전화로 해결할 일이 아니었다. 결국 사무실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 때 시간, 밤 11시 반. 먼저 급한 불부터 꺼야하기에 일부터 진행했다. 얼굴 싹 구기고 말없이 키보드 자판 소리만 들리는 사무실의 공기는 눈 쌓인 시베리아의 고요한 벌판처럼 차가웠다.


  90분 정도 흘렀을까? 새벽 1시가 지나 제출을 끝내고 고요한 벌판의 적막이 깨졌다. “서로의 서운한 점을 이야기해보자.” 사실 단편적 사건의 편린이 화를 촉발시킨 유일한 단서는 아닐 것이다. 각각의 일들은 동전을 던졌을 때 나오는 앞면과 뒷면의 확률 간 관계처럼 독립변수가 아니다. 단편이 모여 하나의 소설집을 이루고, 작은 챕터들이 모여 하나의 장편소설을 구성하는 것처럼 서로의 서운한 점이 쌓여서 지금의 전쟁을 발발시킨 것이다. 낮에 Y가 하지 않은 보고, 밤에 Y가 그냥 제출해버린 신청서는 도화선일 뿐이었다.


  “난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해. 하지만 너의 말투가 너무 잔인해서 아파.” 내 질문 후 한참의 침묵 후 Y가 뱉은 말이었다. Y가 잘못을 인정할 줄 몰랐다. Y가 나와 맞불을 놓은 이유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말투가 이 전쟁의 또 다른 도화선이었다니. 살짝은 충격이었다. 순간 화가 나서 뱉은 말들이 그에게 잔인한 아픔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와 한바탕할 기운이 깡그리 사라졌다. 왜냐하면 내가 잘못한 부분과 그가 잘못한 부분이 완전 다른 분야이기 때문에. 그냥 서로 잘못한 분야에서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하면 될 일이었다.


  그동안 그에게 뱉은 말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침묵 속에 가라앉은 마음에는 그 말들이 무기가 되어 내 배에 염증을 낸다. 아프다. 염증은 이내 아물겠지만 아팠던 기억은 움직임에 움찔함을 줄 것이다. Y도 그랬을 것이다. 아팠을 것이고, 움찔했을 것이다. 미안한 마음에 울컥했다.


  “서로에게 말 예쁘게 하자.” 마치 연인에게 할 말을 Y에게 했다. Y가 웃는다. 웃음 하나 없던 차가운 공간에 꽃이 피었다. 그렇다. 늘 말이 중요했고 말이 문제였다.


  사무실을 나서니 차가운 겨울 공기가 피로를 깨운다. 편의점에 들어가 음료를 하나씩 샀다. 시원하게 들이키고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Y야. 조심히 가.” Y가 닭살 돋는다는 표정을 짓더니 팔뚝을 한 대 친다. 나도 Y를 한 대 쳤다. 서로 보더니 웃는다. 피로가 산더미처럼 양어깨를 짓누르고 있지만 분명 오늘 밤은 잘 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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