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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거스트 Dec 01. 2022

코리안 스타일 영어도 괜찮아요.

한국에서 배운 영어로 유럽에서 일하기

 

외국계 회사 경력 20여 년, 해외 근무 10년 이상. 나를 잘 모르는 분들은 내 영어가 꽤나 유창할 거라 짐작한다. 뭐,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나는 한국에서 나고 자라고 교육받았다. 짧은 여행들을 제외하고, 해외에 처음 나가서 살아본 건 대학 졸업 후 스무 살 중반 무렵의 1년 남짓. 한국의 공교육에 최적화된 나의 영어 실력은 서른이 될 때까지도 이랬다. 시험을 보면 1등 (어휘, 문법, 독해는 최상급). 말을 걸어보면 어버버.


  그런 상태로 싱가포르의 아시아 본부로 갔는데, 첫 삼 개월은 정말 괴로웠다. 가장 속상한 건 동료들이 나를 무시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였다.

  몇 번이나 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대규모 회의. 발표자 프레젠테이션 이후 질의응답 토론 시간. 내가 용기를 내어 의견을 말하면 진행자가 "Thank you 고마워, 잘 들었어" 하고 만다. 그런데 꼭 그다음에 다른 직원이 내가 한 말을 똑같은 내용에 말 순서만 바꿔서, 마치 새로운 견해인양 쏼라쏼라 늘어놓는다. 기가 막힌 건 좌중의 반응. "Great point! Building on that... 정말 좋은 포인트야! 거기 내가 덧붙이자면 말이야... "  


(왜...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나서 알게 됐다. 동료들이 날 무시해서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당최 못 알아들었다는 걸.   



 

 퀴즈! 아래 두 개의 뇌 사진이 있는데 하나는 매우 활성화된 상태 (불 켜진 뇌), 하나는 거의 수면 상태 (불 꺼진 뇌)다. 당신이 좋아하는 브랜드 (e.g. 코카콜라, 레고, 나이키)를 보았을 때, 당신의 뇌는 어떤 상태일까? 켜진 뇌 or 꺼진 뇌?

 

1번. Activated Brain 활성화된 뇌.                                             2번. Deactivated Brain. 잠자는 뇌


나는 자신 있게 1번에 번쩍 손을 들었다. 세미나 참석자의 99%가 함께 손을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를 보면 내 눈도 반짝, 내 뇌도 반짝. 당연한 거 아님?


정답은 2번.


우리의 뇌는 익숙한 것을 볼 때 편안한 디폴트 (잠자는 뇌) 상태가 되고, 좋은 기분을 느낀다고 한다. 달리 말하면 낯설고 새로운 것을 마주할 때엔 뇌에 불을 켜고 학습을 해야 하는데 이게 상당히 긴장되고 피곤한 일이란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다시 나의 영어 고군분투기로 돌아가자면...

 나의 영어는 코리안 스타일이다. 리듬을 타고 물 흐르듯 이어지는 영어권의 외국인들에겐 좀 새롭고 낯설 테다. 고객사나 잘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스피치를 할 때면 이걸 적나라하게 느낀다. 편하게 앉아서 웃고 있던 사람들이 내가 입만 열면 심각한 얼굴이 되어 인상을 퐉 쓰고 쳐다보는데, 처음엔 엄청 쫄았다. 이젠 뭐 그러려니 하지만. (나름 열심히 알아들으려고 애써주는 것 같아 짠하기도 하다.)


 10여 년을 외국에서 살고 있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한국식 억양은 좀체 사라지지 않는다. 대신 다른 방법으로 상대방의 긴장을 풀고 (뇌에 불 켜짐 방지) 내 말을 그들의 귀에 좀 더 쉽게 꽂아주는 노하우가 생겼다. 생존전략이랄가.



상황 1. 동료들의 열띤 토론에 끼어들 때

  내가 어느 편에 서는지 (동의하는가, 반대하는가) 일단 밝히고 들어간다. 운전 중 차선을 변경할 때 좌인지 우인지 알려주는 깜빡이를 켜듯이. 설령 당장의 토론이 의미 없어 보이고 내가 가진 제3의 생각이 훨씬 근사할지라도, "By the way, I think...  근데 얘들아, 내 생각은.." 하면 잘 안 먹힌다. (순전히 개인 경험)


[실전 예시]

A. 전반적으로 동의는 하지만,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싶을 때

That's a great idea. I agree with you. And I think...  좋은 생각이야. 동의해. 그리고 내 생각은...

I agree. To build on that... 찬성이야. 거기에 덧붙이자면...

You just made an excellent point. In my view... 말 잘했어. 내 생각에는...  (자기애 ego가 강한 사람일수록 나의 극단적 칭찬에 얼른 입을 다물고 내 다음 말에 귀를 기울인다)


B. 하는 말들이 마땅치 않고, 내가 다른 의견일 때

I am not convinced. Because...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왜냐하면..

I disagree. Because... 반대야. 왜냐하면..

아, 상대방이 미국인이거나 아시안일 때 이렇게 직구를 날리면 교양 없다고 싫어한다. 그럴 때는 I am afraid I don't fully agree. Because.. 미안하지만 전적으로 동의하긴 힘들어. 왜냐하면... 이렇게 돌려 말하는 게 낫다.



상황 2. 설명하기 복잡한 주제에 대해 내 의견을 말해야 할 때

  이 상황이 얼마나 복잡한지 일단 알려주겠어 하는 마음에 "That's complicated. Let me explain first... 복잡한 상황이야. 일단 설명부터 해줄게" 하고 말이 길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듣는 사람의 인내심이 바닥난다. 내 의견을 물었을 때는 먼저 답을 해주고, 그다음에 설명을 붙이는 게 좋다.


 [실전 예시]

 A.  내용의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릴 때. 또는 일부는 결정이 되었고, 일부는 아닐 때.

 My answer is yes and no. Because... 내 답은 yes and no 야. 왜냐면...


 B. 두 가지 상황이 인과 관계로 물려 있어서 한쪽이 맞고 틀리다고 하는 게 의미가 없을 때  

 That is a chicken-and-egg situation. Let me tell you why... 닭이냐 달걀이냐 상황이야. 왜 나면...



상황 3. 비즈니스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반드시 첫 장은 전체 요약이 담긴 한 페이지 (Executive Summary)로 시작한다.

 기/승/전/결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다가 솔루션을 빵 터뜨리는 극적 드라마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내 낯선 억양이 주는 긴장감 만으로도 청중은 충분히 피곤할 터.

 결론은 앞에서 미리 알려주고, 프레젠테이션 동안 그 결론을 뒷받침하는 분석 자료를 차근차근 보여주는 방법이 청중을 설득하고 동의를 얻는데 더 효과적이다.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사실 내가 얻은 노하우는 단순하다. 나의 독특한 한국식 영어를 알아듣느라 고생할 청자의 뇌에 피로를 덜어주는 방법은 - 결론부터 말하자. 그리고 질문에는 설명이 아닌 대답을 해주자. 이 단순한 말버릇을 들이기까지 나는 꽤 오랜 시행착오를 겪었다. 우리나라에서 배우고 자란 30년간 나의 소견을 에둘러 말하는 간접 화법이 몸에 배어서인 듯.


 여러 사람들 앞에서 내 의견을 날것의 느낌으로 딱 말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용기와 논리적인 말하기 연습이 필요하다. 비록 영어가 모국어인 동료들처럼 화려한 언변과 드라마틱한 스토리텔링으로 좌중을 들었다 놨다 하진 못하지만 나는 이 방법으로 외국 동료들과 소통하고 당면한 문제들을 함께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영어가 고민인 누군가에게 작게 마나 도움이 되었으면.




(이미지 출처:thepetsho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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