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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거스트 Dec 26. 2022

아프냐, 나도 아프다.



 우리 팀에 Misha 미샤라는 직원이 있다. 러시아 남자. 본명은 Mikhail 미하일. 원래 타 지원 부서에서 우리 사업부로 파견된 직원인데 자기 할 말 똑부러지게 하고, 똘똘해보여서 평소 눈여겨보다가 6개월 전에 내가 우리 팀으로 데려왔다.


 지난 주 우리 팀 4사분기 offsite (오프사이트 - 오피스 밖에서 하는 이벤트나 워크샵) 진행을 미샤에게 맡겼다. 준비도 열심히 하고, 그날 오전 진행도 매끄러웠고. 나를 완전 쫄깃하게 만든 그 순간 전까지는.


 다들 돌아가면서 그해 잘한 일, 못한 일, 내년에 다르게 접근해볼 일들을 말하는 세션이었다. 생각 깊고 말 잘하는 European 유러피안들답게 잘 진행하고 있는데 미샤의 순서가 되니 OMG (오 마이 갓). 본인의 성과 부족은 회사의 사공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고, 인수인계는 형편 없었으며, 이놈의 일은 도저히 가망이 없댄다. 고로 본인은 억울하다의 삼단 콤보를 늘어놓는데, 이 타령이 끝날 기미가 안보였다. 회의실을 둘러보니 다른 직원들은 슬슬 핸드폰을 보기 시작하고 잘 진행되던 분위기가 산으로 가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팀장인 내가 수습해야지, 하는 생각에 ELMO 엘모를 소환했다. "Hey, I see our ELMO is coming! 얘들아, 저어기 엘모가 온다". ELMO 엘모는 우리가 회의 중에 삼천포로 빠지거나 답 없는 소리로 뱅뱅 돌 때 은유적으로 쓰는 표현으로 Enough, let's move on (됐다고마, 넘어갑시다)라는 뜻이다. 말로 하면 살벌하니까 대신 귀여운 엘모인형 (세서미 스트리트의 캐릭터 중 하나)을 들어올리거나, 이미지를 캡쳐해서 보여주면 대부분 빙그레 웃고 다음 화제로 넘어간다. 엘모가 오고 있다는 나의 말에 다들 빵 터지고, 미샤도 머쓱하더니 마무리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순서를 다 돌아서 팀장인 내 차례. 몇가지 잘된 점, 접근 방식을 바꿔야 하는 포인트들을 짚고 나서 훈훈하게 마무리하고, 이제 점심 시간이니 진행자인 미샤를 쳐다봤다. 밥 무러 갈까?


 

 그런데 갑자기 미샤가, "I can't do this. 나 못해!"

 본인은 더 이상 진행을 못하겠다는 거다. 조금 전 세션에 원숙이 자기의 발언을 ELMO로 잘라버린 것이 너무 화가 나서 더 이상 세션 진행이 불가하다고 정색을 하면서 말하는데, 다들 눈이 동그래져서 나랑 미샤 얼굴을 번갈아보고.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사람은 말하는 속도보다 5배 빠른 속도로 생각할 수 있다던데, 사실이다. 미샤가 몇 마디 하는 동안 머리 속에 오만가지 시나리오가 나오는데 '와 이거 봐라' 부터, '어떻하지? 어떻하지?'를 거쳐 '화를 낼 순 없고, 침착하게, 침착하자'. 그리곤 입을 땠다. "미샤, 네가 그렇게 화나 났다니 안타깝네. 오늘 너는 두 가지 역할을 하고 있지. 하나는 행사 진행자, 그리고 하나는 팀원. 네가 팀원으로 너의 의견을 말하는 동안 너의 time keeper (행사 시간 관리자) 역할을 잊은 것 같아서 내가 끼어들었어. 누군가는 진행을 해야 하니까. 너 괜찮아? 마음이 좀 진정 돼?"

 "아니, 난 다시 reset리셋을 하지 않으면 더 이상 진행을 못하겠어. 일단 점심 시간이니 다들 식사하러 가. 나는 볼 이메일도 있고. 나중에 조인 join 할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어색해진 직원들은 우루루 방을 나가고, 나는 일부러 회의실에 남았다.


 "미샤, 얘기 좀 하자. 왜 그래?"  둘만 남으니, 미샤의 목소리가 한층 더 격양되었다. 눈은 자기 노트북 화면을 뚫어져라 노려보는 채로. "엘모는 '그만 입 다물어' 이런거잖아. 나한테도 내 속을 털어놓을 기회가 필요한데. 내가 vulnerable 해질 (약한 모습을 보여줄) 기회를 니가 빼앗았어. 난 그래서 화가나."

 아!... 그의 말을 한켠으로 이해하면서, 마음 속에는 그냥 실컷 떠들게 놔둘 것 그랬나 하는 후회, 그래도 모두들 앞에서 고따구로 할 수 밖에 없었어? 하는 얺짢음이 동시에 일어났다. "그래 알았어, 이해해. 하지만 진행자로서의 너의 태도는 어땠다고 생각해? 프로패셔널하게 할 순 없었어? 나한테 나중에 와서 했어도 되는 말이었잖아." (으르릉 컹컹!) 노트복 화면을 노려보던 미샤가 눈을 떼지 않고 대꾸했다. "일부러 그랬어, 너무 화가 나니까" 그리곤 한 톤 낮추어 덧붙이길 "내 좌우명이 continuous improvement (지속적인 개선) 이라고 했었잖아. 앞으론 더 나아지겠지."  


 에혀, 이거야 말로 ELMO네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난 회의실을 나와 손도 닦고 기분도 바꿀 겸 화장실에 갔다. 손을 씯고 거울을 보는데 문득 그의 입에서 나온 vulnerability (약한 모습)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제길. 그러게, 그냥 속 풀이 좀 하게 놔둘걸. 내가 뭐라고 걔 입을 막았지.. 미샤의 남탓이 나에 대한 비난으로 들렸던 걸까...? 아몰라. 밥이나 먹자.


 팀원들과 합류해서 밥을 먹고 있자니 미샤가 왔다. 그 사이 reset (마음 가다듬기)를 충분히 했는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하하호호.

 모두 점심을 먹고 다시 시간에 맞춰 회의실에 모였다.  오후 세션을 시작하기 위해 초빙 연사가 오고, 컴퓨터 화면을 세팅하면서 다소 어수선해진 순간, 나는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겠다 싶어서 심호흡을 두번 하고 입을 뗐다.

 "Hey all. 얘들아. 아까 오전에 미샤가 나의 ELMO 엘모에 대해 feedback 피드백을 줬잖아." 미샤를 포함한 열명의 눈동자가 나에게 집중. "내가 생각해봤는데, 내 머릿속으로는 시간 관리 때문이었다고 했지만, 사실은 나의 팀원이 vulnerable 약해지는 순간을 내가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것 같아. 미샤의 약한 모습을 내가 마주하는게 두려웠나봐. 그래서 엘모를 부른 것 같아. 미샤, 미안해."

 모두의 눈이 똥그래진 상황에서 미샤의 눈은 두배 더 똥그래지더니, "Thank you, Wonsook for saying so.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원숙". (지가 미안하단 소린 절대 안하네. 그래도 뭐 내 속은 시원타). 그리고 다른 쪽 구석에서 나오는 Philip 필립의 한 마디. "Wow Wonsook, thank you for pointing it out. That's very nice. 와, 원숙, 짚고 넘어가줘서 고마워. 좋다". 그리곤 자연스럽게 다음 순서로 moving on.


 그렇게 오후 세션이 시작되고, 각각의 주제에 몰입해서 오프사이트를 잘 마치고, 팀 활동도 하고. 그날 하루는 매섭게 추웠지만 잘 마무리됐다.


 며칠 후 팀의 다른 직원과 1대 1 면담을 하는데 그가 당시 일을 꺼내면서 하는 말. "원숙, 나는 너의 리더십 스타일을 정말 admire해 (우러러본다?). 넌 비즈니스 상황에서는 누구보다 날카롭지만, 사람 관계에선 놀랍도록 인간적이야. 난 그래서 니가 존경스러워."   


 에고. 간지럽네. 그리곤 생각했다. '있잖아..., 나도 사람이야. 너희들이 내가 한마디 하면 어쩜 그러냐고 속으로 막 뭐라고 하지? 야.. 나도 니들이 들이받을 때마다 아파. 그리고 너희들만 상사 있니? 나도 어마무시하게 어렵고 무서운 상사 모시고 산다. 살살하자 얘들아. 나도 맞으면 아프다고...'  

 



(대문 이미지: by John Hain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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