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오래 묵혀지는 동안 한 번쯤 머릿속에 떠오른 기획 아이템은 죄다 다른 사람의 실행력으로 현실이 되어 버렸다.
여러 사람의 서평을 곁들인 온라인 서점은 알라딘을 비롯한 거의 모든 온라인 서점의 기본이 되었고, 프라이빗한 라이브러리와 모임 장소를 곁들인 고즈넉하고 지적인 오프라인 공간의 서점은 최인아 책방이 하고 있다. 처음에 최인아 책방이 오픈한다는 소식과 그 컨셉을 들었을 땐 마치 누가 내 아이디어를 베껴간 듯한 배신감에 혼자 부르르 떨기도 했다. 벌써 오래전 일이다. (지금은 최인아 책방의 왕팬)
좋은 도서관에 가면 도서관을 짓고 싶고, 유럽 여기저기를 다니며 오래된 책방들을 보면 책방을 내고 싶다. 그리고 이왕이면 동시대 작가들의 멋진 예술품도 한 두 개 들여놓고 싶다.
무엇을 하든 자본이 있어야 할 터인데, 이 회사를 다니는 동안에 자본 모으기는 어림도 없다는 말을 하면서 HR 헤드인 마리안 Marian을 쳐다봤더니 마리안만 빼고 모두들 웃는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항상 내 생각과 다른 사람들의 생각 사이의 절충안을 찾아왔다. 내 의견 30을 내어놓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 70을 먼저 찾아 꺼내놓곤 했다. 그리고 이런 '을'의 생활을 적어도 10년은 더 할 것 같다. (50세 은퇴의 꿈은 현재 통장의 잔고를 보고 깨끗이 접었다.)
은퇴 후 책방을 내면 좀 멋대로 살고 싶다.
내 맘대로 꾸민 공간에 내 맘에 드는 책들을 놓고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그런 곳을 만들고 싶다. 세계 곳곳에 사귀어 놓은 친구들을 돌아가면서 한 두 명씩 불러서 우리나라의 젊고 야망 있는 친구들과 섞어 놓고 밤새 웃고 떠들다가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만들기도 하는 그런 생각 공작소 같은 곳을 만들면 너무 좋겠다. 아마 내가 돈 모아 은퇴할 때 즈음이라면 다른 누군가가 이미 현실화해놓을지도 모를 일이다.
회사가 나의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 회사원이라는 여정을 마친 다음에 또 다른 신나는 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 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해진다.
그날이 오기까지는 좀 힘들어도 참고, 좀 어려운 일이 주어져도 배움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나가갈 생각이다. 역시 나는 옛날사람.